『시작』2015-봄호 <조강석/ 훔치고 싶은 시 세 편>에서 발췌
미아에게
기혁
여름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잠든 개에게서
독신(獨身)이라는 말을 배웠다
하나의 원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건 편파적인 생애
매일 밤 수직의 고단함을 은폐하던 양초와
떨어진 후에야 벚나무의 내력을 각주로 덧붙이던 벚꽃처럼
외로움이란 연필심 묻어나는 모양자를 가져갈 뿐
변명의 궤도를 그려 오지 않는다
눈감지 못한 혈육의 눈꺼풀을 쓸어내릴 때
동공의 연륜을 따라 반짝이던 별빛들의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홀로 마신 저녁을 게워 낸 물새가
눈 속으로 들어온 별빛을 뒤적거리며 날아가는 곳.
자구라는 푸른 경이(驚異)를 한 장 엽서로 보내온 오빠에게
누이는 자신의 화법이 우주 비행사의 두 눈을 닮아 있음을 슬퍼한다
객사한 직계의 시신을 대문 앞에 두는 풍습을
원근(遠近)이 어긋난 삶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나
서로를 침범하지 않을 만큼만 나이테를 늘려 가면
익숙한 곳에서부터 길을 잃곤 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한평생 대문을 열고 잔 노모(老母)가 사방을 걸어 잠근 채
동공 속에 떨어진 연필심을 털어 낸다고
되돌아온 손을 잡으면 중력이 없는 슬픔에도 눈물이 고였다
서로 다른 윤곽으로 맴도는 우주의 한 이름, 미아
일생에 두 번 타인의 원주를 지나야만 한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기립박수』, 민음사-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사건을 풀어내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낯선 대상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가 독자의 눈앞에 선명하게 불거지게 하는 시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하나의 명료한 의미 쪽으로 수렴되는 경우도 있다. 기혁의 첫 번째 시집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기립박수』에는 이 세 가지 방식을 다양하게 활용한 시들이 실려 있는데 인용된 시는 세 번째 쪽에 가깝다.
텍스트의 짜임에 있어 이 시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내밀함은 '미아 된 자로서의 삶'이라는 주제 의식에 부합하는 이미지들의 조응이다. 특히 시의 전반부에서는 이런 내밀함의 조응이 텍스트의 결을 돋우는 주요 기제로 작용하면서 시의 기본 정조를 형성하고 있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잠든 개가 자기애적 순환과 유폐로서의 독신의 이미지를 형상적으로 제시한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독신의 삶의 원리를 이루는 "하나의 원"이 편파적 생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미아로서의 삶이라는 주제 의식을 직접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수직적 지향이 실은 무게에 붙들린 삶의 고단함을 은근히 지시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불꽃과, 분리 후에야 내력을 더듬어야 하는 일을 시작하는 떨어진 벚꽃의 이미지는 미아의 처지와 삶을 역설적으로 구성해 보여 준다. 외로움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외로움이란 것이 스스로 정해진 형태대로 모양을 산출하는 모양자의 선을 그리는 것처럼 일종의 유폐적 자기애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진술 역시 이 시에서 설정된 미아라는 존재자의 삶의 조건을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보이고 있다. (……) 이 무대는 자전적이거나 실존적이거나 간에 틀림없이 표현주의의 유산이다.
*『시작』2015-봄호 <훔치고 싶은 시 세 편>에서 발췌
* 조강석/ 2005년 《동아일보》로 문학평론 등단. 비평집『이미지 모티폴로지』『경험주의자의 시계』『아포리아의 별자리들』, 연구서『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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