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공책
김유석(1960~)
공책 한 권 달랑 들고
들판학교 다니는 우리 아빠
빽빽이 썼다가 지우고
이듬해 봄부터 다시 쓰는
그래도 너덜거리지 않는
울 아빠 파란 공책에는
찰랑찰랑 벼 포기들이 넘실거려요
맞춤법이 조금씩 틀린 벌레소리 들리고
할아버지 닮은
염소도 한 마리 묶여 있어요
똑 똑 똑
땀방울 말줄임표를 따라가면
하늘이 내려와 밑줄을 긋는 지평선 위에
따뜻한 내 옷이랑 새 운동화가 놓여 있지요
흰 눈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내서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너무 꾹꾹 눌러 써서
뒷장에 남은 자국을
겨울이면 기러기들과 함께 읽지요
* 신춘문예 당선작을 찾아보다가 시보다 더 시 같은 동시 당선작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아빠의 공책」이라는 이 따뜻한 동시 한 편으로 인해 나는 얼마나 질투에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박찬욱의 영화 제목(사실 이 영화의 제목은 기형도의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처럼 좋은 시에 대한 나의 질투심은 끝이 없다. 들판학교에 다니는 시인의 파란 공책에는 언제나 말줄임표 같은 땀방울이 흥건히 젖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는 평생 흙을 떠받들고 사는 농부였고, 앞으로도 농부의 삶을 살 것이다. 농부의 땀방울이 들판의 풍경과 만나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고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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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 감성 시 에세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에서/ 2015. 3. 31. <문학의전당>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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