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벽
최현우
유목을 멈츤 이후로 벽이 발명되었다
그때부터
밟혀서 지워지지 않도록
사람은 기억을 벽에 옮겨 보존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전시를 철거하고 나면
차고 흰 벽에는 못구멍들이 남았다
한 점으로 흘러나오는 벽의 내부
밀도 높은 어둠이 근육이라는 걸 알았다
다음, 다음으로
다른 그림을 걸고 다시
전람회는 열려야 하기에
벽은 회복을 시작하고
통증을 빻아 만든 가루
시간에 불행을 섞어
한 움큼 집어 바르고
모르는 거리에서 몸을 말리면
지구도 지구를 교체하기 위해
재앙을 사용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새벽을 펴 바르며
간밤의 별자리를 문질러 메우는 손
나는 복원되지 않는다
무수하게 뚫고 메우다 보면
처음의 벽은 이미 사라진 벽
우리는 어둠을 갱신하며 서 있다
* 『예술가』2015-여름호 <이 시인을 읽는다/ 근작시>에서
* 최현우/ 2014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심(無心)-저수지 고사목/ 김주대 (0) | 2015.06.19 |
---|---|
자욱한 믿음/ 최문자 (0) | 2015.06.19 |
거울/ 허형만 (0) | 2015.06.19 |
공중국가/ 박무웅 (0) | 2015.06.06 |
너무도 사소한 별에서 산다/ 이도훈 (0) | 2015.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