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작은 파티
정숙자
어느덧 또 한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듯이 내년이라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만 돌이켜보면 그해가 그해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나이를 먹었고, 국가는 역사를 보탰으며 지구 또한 자전과 공전 사이 그만의 부침(浮沈)이 있었을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의 모든 이들이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되리라. 그리고 그 많은 기억의 두루마리에서 시들지 않는 시간도 꺼내보게 되리라. 나 또한 이 무렵이면 떠오르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
그때 남편은 모 대대(大隊)의 지휘관이었다. 여느 가장과는 달리 ‘Home Sweet Home’을 구가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들뜨기 쉬운 시즌에는 경계태세에 만전을 기하고 또 기하는 게 당연한 일. 그 아내 역시 이의 제기 불가. 군인의 업무는 근무가 아닌 국방이 아니던가. 사정이 이와 같기로 병사들이나 나나 일 년 중 외롭기로는 크리스마스보다 더한 날이 없었다. 때문이었을까. 해마다 성탄절 전야가 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파티를 열고는 했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먼저 따뜻해졌다. 어느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고생하는 병사들 가운데 틈낼 수 있는 몇몇을 초대하여 '브라보!'를 섞었던 것이다. 그래봤자 내가 온종일 수그리고 만든 찐빵이나 과일, 맥주, 땅콩 등이었지만 잠시의 향수를 달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내 나이 서른하고 하나였던 바로 그해. 크리스마스 전야의 배경인 부대와 관사 사이엔 볼품없는 콘크리트 담벼락이 우뚝 세워져 있었다. 거긴 후방이었으나 나에게는 최전방과 다름없는, 친구 하나 없는, 낯선 객지일 뿐이었다. 석기시대도 아이었건만 그 시절엔 가가호호 전화라는 날개도 없었다. 나는 아직 어린 남매를 키우는 처지인 데다가 남편은 내 남편이기보다는 여전히 나라의 남편이었다. 어쨌든 ‘크리스마스이브는 병사와 함께’를 내리 지켜온 나로서, 그해만큼은 한 겹 담장 사이에서 몇몇 병사만을 초대한다는 게 영 마뜩잖아 색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파티를 대신할 그 계획이란 부대원 전원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이었다.
귤 한 상자, 담배 세 갑, 사탕도 큰 걸로 두 봉을 샀고…, 일단 버리지 않고 모아둔 색색무늬 파지(破紙)로 비슷한 크기의 봉투를 사오십 개 만들었다. 봉투 위쪽에 일일이 이름을 적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메시지도 덧붙였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어린 아들딸은 잠들어 나 홀로 거실에 쪼그리고 앉은 채 봉투를 채워나갔다. 귤은 두 개씩, 사탕은 세 개씩, ‘X—mas’라고 사인한 담배는 각각 한 개비씩 넣었다. 다양다색 가지런한 그 봉투들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silent night holy night'(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의도를 상황실과 소통했고, 선물상자를 건네며 당부했다. “병사들이 잠깨지 않게, 머리맡에 놓아주세요.” 나도 단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오전,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현관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수줍음을 잔뜩 머금은 병사 한 명이 성탄카드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간밤의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이었다. 경위인즉, 새벽 세 시쯤 한 병사가 우연히 깨어 봉투를 발견했고, 모두의 머리맡에 놓인 봉투를 보고는 하나둘 깨우기 시작해 전원이 일어났다.
“어떤 산타가 다녀간 거지?” 웅성거리다가 “뒷집 아줌마의 선물”임이 확인된 후 그 한 개비의 ‘X―mas 담배’를 피워 물며 모두들 울었다고 한다. 그 아침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받은 카드 중 최고로 예쁜 걸 골라 속지를 뜯어내고 ‘뒷집 아줌마’에게 답장을 쓰기로 했다. 그것도 엄선된 신입병사로 하여금 배달케 했다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더 순수한 사람이 갖다드려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얼마 후 남편의 전근발령이 났고 우리 가족은 이사하게 되었다. 이삿짐 트럭과 우리 가족이 떠나자 병사들이 관사에 뛰어들어 마당을 두드리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 우리는 진짜 선물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성탄절 카드도 그렇거니와 마당에 주저앉아 흘렸다는 눈물 또한 나에게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닳지 않는 선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남편이 퇴역한 지 벌써 십오륙 년이 되었다. 말 그대로 집주인보다는 바깥주인이었던 그가 현충원에 안장된 지도 2주기가 지났다. 길게만 느껴졌던 어려움도 한나절 뭉게구름이었던 것만 같다. 그때 그 병사들도 지금쯤 중년이 되었을 텐데,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내 어린 시절, 어른인 줄만 알았던 군인아저씨! 그러나 너무나도 어린 소년들! 크리스마스 캐럴 울리는 밤이면 얼마나 집 생각날까! 어머니가 보고 싶을까! 올해는 유독 군대의 비보(悲報)가 많아 그네의 엄마만큼이나 내 억장도 무너졌다. ‘이 밤에도 전후방에서 고생하는 우리 국군 장병 여러분! 멀리서나마 영원한 ‘뒷집 아줌마’가 인사를 전합니다. 새해엔 더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운명을 사랑하는 자만이 운명으로부터 사랑받는다.” 이 짧은 한마디는 내 젊은 날의 고통과 맞바꾼 정신의 뼈다. 지구가 둥근데, 누구에겐들 평지가 주어질까보냐. 삶이란 움퍽짐퍽 이어지는 것. 우리 모두 평등하게 나이 먹을 수 있다는 점에 고마워하자. 행운이란, 행복이란 우리의 근면과 성실 사이를 서성거리다가 서서히 자리 잡는다. 이 저물녘엔 자신에게 미소를 짓자. 그 마음 씀씀이 하도 어여뻐 행운의 여신도 미소 짓도록, 우리 찬찬히 그렇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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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_ 시인. 1952년 이슬이 아름다운 김제벌에서 태어났습니다. 13세 때 시에 매혹되었고, 그로부터 읽고 쓰기와 인생수업을 병행했습니다.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나이 40에 이르러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 『뿌리 깊은 달』 등을 냈고, 산문집 『밝은음자리표』『행복음자리표』가 있습니다.
*『샘터』2014-12월호/ 샘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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