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구석 외 1편
이정희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고 느낄 때
구석은 얼마나 웅크리기 좋은 곳인가
구석은 모든 난감의 안식
불가항력과 자포자기를 모색하기 좋은
벽을 마주 보고 앉는다는 말은
벽도 앞이 있다는 뜻이겠지
앞을 놓고 보면 깊은 뜻 하나
싹 틔우자는 뜻일 테고
귀를 틀어막고 등지고 앉으면 슬픔 가득한
밀리고 밀린 뒤끝이란 뜻이겠지
닭장 문을 열면 닭들이 구석으로 몰리는 것은
막다른 구석도 문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
한밤중 옥상에 나가면 흔들리는
이곳저곳에서 붉게 빛나는
저 퇴로를 자신하는 구석들
어둠이 숨겨놓은 문이 있다고 확신에 찬 구석들
흐릿한 별들의 바탕, 무표정한 하늘
너무 먼 그곳을 구석이라 여기지만
한밤에 구석을 찾지 못해 우는 사람들
적막과 대치 중인 이 골목은
한 사람의 발등을 막 넘어선 구석
-전문(p.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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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의 지구
초침이 세운 알람 소리에 지구의 정각이 표시되고 마지못해 뜬 눈꺼풀 사이로 지구가 돌죠 우두커니 서있던 공중이 레미콘 차량 속에서 타설을 기다리며 어젯밤의 지평선과 수평선이 섞여 돌아가죠 하루라는 것, 일 년이라는 것, 혹은 평생이라는 것, 알고 보면 붙들지 못하는 계절처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죠 저마다의 그림자를 섞으며 얇은 잠을 열고 나오는 것이죠
지구는 며칠을 한꺼번에 돌리지 않죠 딱, 그날 하루치만 열심히 열고 닫는 일로 바쁘죠 고리도 없이 연속으로 표류하는 하루를 안간힘으로 붙들고 버티는 거죠 가끔 뻔한 일의 반복 학습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한쪽을 늦추거나 당기며 분탕질하기도 하죠 불시착한 햇살은 사막이 되고 너울져 흐르는 물은 굳지 않으려고 23.5도 기울기를 끌어안고 빙빙 섞이죠
우주 끝자락을 잡고 번번이 이탈하려는 지구는 아무 재활도 없이 또 하루를 견뎌야 할까요 사람에 갇힌 지구, 지구를 소비하는 우리
-전문(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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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하루치의 지구』에서/ 2024. 11. 8. <상상인> 펴냄
* 이정희/ 경북 고령 출생, 202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꽃의 그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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