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날아간 깊이
이진희
눈, 부셔
허공을
가차 없이 후려쳐 벤 듯
총성이 터지기 직전 하염없이 반짝이던
차고 새하얀 겨울 산비탈처럼
폭포 소리 무심한 해안 절벽의 지나친 아름다움처럼
유해의 흔적마저 없이
얕은 음각으로 남은 이름
-전문-
▣ 그녀는 그럼에도 시를 쓴다/ 1. 처음 빛에 매혹당하다(발췌)_이병금/ 시인
「나비가 날아간 깊이」에서 빛을 감지하는 또 하나의 눈은 그녀 자신의 내부로 한없이 빠져들어 그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 단단한 바닥에서 갑골문자처럼 오래된 언어를 만난다. 유해의 흔적마저 없는 이곳은 죽음조차 미끄러지는 빛의 피부일까. 그녀가 이끌린 매혹의 순간은 그녀만의 것이기에 육체 밑바닥에 침전물로 쌓인 언어의 사리들로 잡혀지지 않는 빛의 몸을 그려보고자 한다. 아니 빛의 육체는 언제나 거기 있었을 것이다. 형상을 기호로 재구성하려는 욕망이 어리석을지라도 가장 부드러운 비단의 실로 패인 고랑을 떠내고자 한다. 빛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어떻게 그곳에 도달했는지는 말해질 수 있다. 혹은 왜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그러기에 죽음마저도 빗겨가는 이 환함의 순간을 다시 살아내고 싶어서 그녀는 시를 쓰고 다시 쓴다. (p. 시 225/ 론 225-226)
---------------------
* 이병금 평론집 『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에서/ 2023. 12. 20. <동학사> 펴냄
* 이병금/ 1988년『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저녁흰새』『어떤 복서』등
'비평집 속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못/ 김광선 (0) | 2024.01.18 |
---|---|
이병금 평론집『시 읽기의 새로운 물음』/ 구름 농사 : 유재영 (0) | 2024.01.17 |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우대식 (0) | 2023.11.26 |
김세영_산문집『줌, 인 앤 아웃』/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0) | 2023.11.25 |
무령왕의 관정(棺釘)/ 문효치 (0) | 2023.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