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남희_우수시 깊이 읽기(부분)/ 추적 : 류미야

검지 정숙자 2023. 10. 19. 19:45

 

    추적

 

     류미야

 

 

  비 오는 가을 아침 누가 다녀갔습니다

 

  창가에 물기 많은 마음을 그려놓고

 

  자는 내 이마를 짚어보곤 새벽녘 떠났습니다

 

  그것이 시간인지 무뎌진 내 마음인지

 

  기억 너머 사라진 저린 이름들인지

 

  얼굴은 못 보았지만 왠지 알 듯합니다

 

  붉게 불탄 입들이, 잎들이 뒹굽니다

 

  고요가 얼마나 뜨거운 말인지를

 

  비 오는 가을 아침엔 알게 되기도 합니다

    -전문- 301

 

  ♠ 아토포스가 선정한 우수시 깊이 읽기(부분)_ 박남희/ 시인 · 문학평론가

  이 시의 화자는 비 오는 가을 아침 창가에 맺혀 있는 물기를 보면서 "창가에 물기 많은 마음을 그려놓고" "누가 다녀갔"으리라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이내 다녀간 누군가가 "내 이마를 짚어보곤 새벽에 떠"난 어떤 존재로 구체화된다. 이 시에서 화자가 추정하는 어떤 존재는 '시간인지' '무뎌진 마음'인지 '기억 너머 사라진 이름들'인지 "얼굴은 못 보았지만 왠지 알 듯"한 대상으로 인지된다. 여기서 '시간'은 순차적 시간의 의미를 지닌 '크로노스의 시간'보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카이로스의 시간'에 가깝다. 그리고 '무뎌진 마음'은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지난 후 특별함이 어느 정도 지워진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기억 너머 사라진 이름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억 속에 특별히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사라진 이름들'이 기억에서 아주 지워진 이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왠지 알 듯"한 정도의 기억은 남아있는 이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화자가 가을 낙엽을 보면서 "붉게 불탄 입들이, 잎들이 뒹굽니다// 고요가 얼마나 뜨거운 말인지를 비 오는 가을 아침엔 알게 되기도 합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은, 화자 자신의 내면에 고요로 숨어 있던 단풍같이 불타던 열정이 불현듯 가을 아침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 '추적'은 '가을의 흔적'이라는 의미와, 비가 내리는 소리의 의성어로서의 '추적'과, 사물이나 사건의 행적을 더듬는다는 의미의 '추적'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시인의 내밀한 상상력의 진폭이 느껴진다. 이 시는 한 편의 시조가 어떻게 깊이 있는 울림의 자유시가 되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점에서 특별히 주목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닌다. (p. 시 301/ 론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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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토포스』 2023-여름(2)호 <아토포스가 선정한 우수시 깊이 읽기> 에서 

   * 박남희/ 1996년《경인일보》 & 1997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고장 난 아침』『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평론집『존재와 거울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