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秘事
최형심
여름 별궁으로 파발이 도착했다. 사자使者는 독대를 청하였다.
잠에서 막 깨어난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시종이 그를 맞았다. 사자는 시종의 인도로 내전內殿에 비친 저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별빛 천막에는 바람을 띄운 술잔들······
예언의 나무에는 만장이 날리고 은마銀馬의 발을 닦아주며 소년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울부짖는 여인들의 벌거벗은 몸이 검은 장막 사이로 사라지고, 안장을 벗은 말들이 입김을 내뿜으며 피를 씻는데
문이 열리고 시종이 촛불을 밝히자 날개를 가진 미물들이 달려들었다. 사자는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칸이여, 들판의 풀들이 당신의 발아래 눕듯 은빛의 피 아래 엎드려 아뢰나이다.
석단石壇 위에는 목만 남은 이들이 천 개의 하늘을 이고 있었는데, 어떤 계절은 흉터처럼 번지는지 막 허물을 벗은 이마에 별자리 돋고
뜨거운 꿈에 젖은 병사의 눈이 붉은 사막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나이다. 입을 벌리고 죽은 아이의 소란한 입속으로 물소리가 흘러들고
살아서 굶은 소년은 입안 가득 검은 파리를 물고 있었는데, 어떤 이는 알에서 온 사람처럼 웅크린 채 타인의 꿈으로 빚은 허상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었나이다.
슬픈 꼬리를 가진 새끼를 잉태하는 밤, 목을 잃은 여인이 들꽃 사이에서 피어나서······ 눈 어두운 자들의 속눈썹에 내린 깊은 밤과 화염에 휩싸인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황금빛 용상에서 칸이 맨발로 일어났다. 촛농에 갇힌 미물들의 날개가 굳어갔지만
주변이 너무나 고요하였으므로 엎드려 하명下命을 기다리던 사자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본 것은 피로 물든 허물을 뒤집어쓴 허공과 맨발뿐이었다.
어둠을 독대한 사자의 어꺠가 굽었다. 그는 엎드려 흐느끼다 반인반마의 등에 실려 여름 궁전을 나왔다.
사라진 성벽과 망루에 내려앉은 오래된 숲이 죽은 자의 눈에서 나와 강으로 걸어갔다.
감지 못한 눈과 눈 사이
영원한 잠 위를 날아가는 은빛 나비 한 마리
-전문(p. 188-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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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토포스』 2023-여름(2)호 <신작시> 에서
* 최형심/ 2008년『현대시』로 등단,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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