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맥문동을 끓이는 오후 외 1편
하호인
물안개 피어오르는 천변에서
내밀한 물의 언어를 듣는다
무릎의 상처에 딱지가 내릴 때쯤
어제가 오늘로 깊어진 생각의 뿌리가
보랏빛으로 여물어갔지
그중 하나 쑥 뽑아 올리면
조랑조랑 딸려 올라오는 열매 같은 뿌리
꽃이어도 꽃일 수만 없는 것은
척박한 땅 어느 그늘에서나
둥그렇게 영글어 가는 모정母情
눈부신 여름날
현란한 보랏빛 다시 마주하지 못할지라도
음지에서 고요히 익어가는 호흡
맥문동 한 줌을 넣고 찻물을 끓인다
어느 것에도 제맛을 주장하지 않는
이 맑은 심심함조차 보랏빛이다
-전문(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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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
추억은 그리운 날의 소낙비로 쏟아진다
살던 집터마저 남의 손에 넘기고
장대비에 젖은 툇마루에 앉아
하늘만 쳐다보시는 아버지
그해 여름부터 소금꽃은 어머니 등에서 피었다
들판을 가르는 천둥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 치던 허기진 날에도
용감한 소년처럼 멈추지 못한 걸음,
돌아보니
분꽃 씨앗 까맣게 영그는 날들이었다
빗방울 털어내며 허리를 곧추세우는 분꽃
찢겨나간 이파리 사이로
금세 노란 펜촉 같은 꽃송이 환하게 피워 올린다
비 오는 하늘에 태양은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어머니의 나직한 읊조림이
가슴 한쪽에 날개를 다는,
이런 날에는 쓸쓸할 까닭이 없지
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
마르지 않은 상흔을 볕 아래 펼쳐 두고
분꽃 다시 피는 소리를 들을 일이다
-전문(p. 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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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에서/ 2023. 9. 18. <상상인> 펴냄
* 하호인/ 전남 광주 출생, 2018년 『시에』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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