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제주 가시리/ 염화출

검지 정숙자 2023. 8. 30. 01:17

 

    제주 가시리

 

     염화출

 

 

  발자국 따라 굽이굽이 녹산로의 숲길 따라 걷는다 사월의 뇌관은 빙하기의 기압과 맞붙어 병풍으로 둘러싸여 있네 길 따라 가시리 풍차의 동쪽 마을 막막한 능선을 떠안고 동남쪽 저, 깊은 한라의 심연에 닿았네 아른대는 수평선 뒤로 하고 먼 지평선에 붙은 봄날의 사진, 갤러리 김영감은 보이질 않네

 

  비경은 바람 부는 탐방 길에 몰려있네 맨발의 평원 큰 바람개비 장엄한 풍광 빙글빙글 돌아가는 지친 발걸음 네모난 의자에 앉아있네 인생사진 없는 나는 순례자, 오메기떡 청귤 에이드 이주민의 정착지에서 보드라운 속살을 내보이는 유도화는 지고 누군가 꺾어놓은 가지에 붉은 바람의 생채기가 아물어가네

 

  잠시 머물다 가는 갑마장 길 조랑말과 꽃잎을 맞으며 노랑 물결 따라 걷는 탐라의 여행자 전망대 왼쪽으로 파란 손수건을 흔들다가 울퉁불퉁 어느 모살밭* 꼼지락거리는 꽃무릇도 부활초를 켜는, 

    -전문-

 

   * 모살밭 : 모래밭, 자주의 방언   

 

  해설> 한 문장: 이 작품에서의 '가시리'는 고유명사로 한 마을의 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제는 물론 전체 작품집의 표제로도 견인된 이 어휘가 단지 한 동네 이름만을 말하고자 사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커다란 함의가 내재하고 있다. "꺾어놓은 가지"에 아물어가는 "바람의 생채기"라는 미학적 존재가 창출되는 원천적 기능을 발하는 어휘로 작동되고 있다. '가시리'라는 말을 대하면 우리는 우선 사랑하는 사람과의 별리를 애절하게 노래한 고려가요를 떠올리게 된다. 통곡의 눈물 대신 마음속으로 슬픔을 태우는 '애이불비愛而不悲'의 이별 이야기   사랑하는 임은 나를 버리고 떠나려 한다. 붙잡고 싶지만 내가 더 싫어질까 봐 서럽게 보내며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애절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그리운 사람을 보내야만 하는 '상실의 아픔'이 서려 있다.

  그런데 떠나가는 그 임의 뒷모습은 본문의 "잠시 머물다" "조랑말과 꽃잎을 맞으며 노랑 물결 따라" 떠나가는 사람의 모습과도 같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가시리'의 화자처럼 시인 역시 그 임이 "모살밭 꼼지락거리는 꽃무릇"을 보며 다시 "부활초"처럼 언젠가 꼭 돌아올 것임을 믿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 민족 정서의 뿌리에 있는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가시리'는 황진이의 시조를 거쳐,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그리고 염화출의 「가시리」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p. 시 13/ 론 119-120) (호병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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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제주 가시리』에서/ 2023. 8. 18. <황금알> 펴냄  

  * 염화출/ 충남 예산 출생, 1994년『문학예술』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산 아래 흐르는 산』『꽃 지면 흙이 될 사람이』『불 꺼진 화원』『등대가 있는 사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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