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품 12 외 1편
-재봉틀
양수덕
재봉틀에 기대 심심할 틈이 없던 엄마 채우지 못하는 그늘 곁에 작은 빛 자리 있어 손수 만든 수예품들에게 자리 내주며 함께 늙는 법을 나누었다 그 잔디밭은 겨울에도 녹색
어느 날 나는 낡은 재봉틀 대신 전기 재봉틀로 바꾸어드린다고 멋대로 내다 버렸다 아무 말도 안 한 채 시선을 피했던 엄마
익숙하지 못해 나도 건드린 적이 없는 새 재봉틀을 엄마는 아주 낯설게 바라보았다 엄마의 재미를 날려버리고 녹색을 걷어차 버린 나는 야외에서 엄마의 몸에 녹색을 부지런히 칠했다 남이 입혀주는 물감이 하루는 갔다
엄마 돌아가신 후 팽개쳐 버린 엄마 손이 내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에야 잘못이 깊은 줄 알았다 때는 늦어도 너무 늦었는데 재봉틀을 찾으러 시간을 거스른다 잃어버린 녹색 잔디밭의 가장자리라도 밟아보게
-전문(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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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홀리다
바다가 엄마의 손을 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여긴 더없이 따뜻하고 아늑한 궁궐이 숨어 있어
전설이 레드카펫을 깔아놓은 곳이야
물의 여왕을 모시러 갈게
여기서 사는 것처럼 살게 해줄게
흔들리며 솟구치며 당신 어둠의 속살 뽀득뽀득 문질러줄게
바다의 말을 들었는지 엄마 대꾸다 숨긴 고백이다
바다를 보면 왠지 들어가고 싶구나
바다 앞에서 감출 수 없는
검고 깊은 엄마의 소용돌이
어떤 어둠은 속을 알 수도 엿볼 수도 없는데
행복한 주홍 산호처럼 엄마는 바다를 보면 안기고 싶었을까
그때가 언제인지 거기가 어느 바다인지 기억이 없지만
이후 바다만 보면 무서워졌다
죄 없는 사람을 홀려 데려갈 수 있는
환상이 헤프게 일렁거리는 바다
-전문(p. 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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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자전거 바퀴』에서/ 2023. 8. 17. <상상인> 펴냄
* 양수덕/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신발 신은 물고기』『가벼운 집』『유리 동물원』『새, 블랙박스』『엄마』『왜 빨간 사과를 버렸을까요』, 산문집『나는 빈둥거리고 싶다』, 동화『동물원 이야기』, 소설집『그림쟁이 ㅂㅎ』『눈숲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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