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essay>
나는 이제 무슨 시를 쓰나
전형철
못된 버릇이 있었다. 못됐다기보다 짓궂었다고 포장할 수 있겠다. 대학 때였고, 2학년이 되어 후배들이 입학할 때부터였다. 시 하나만 생각하고 국문과에 진학한 꽤 순수한(?) 문청이었던 나는 듣는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자, 술자리 첫 만남에서 이런 주문을 했었다. 네가 좋아하는 시 말고 네가 외울 수 있는 시를 하나 외워 봐라. 당황한 후배들은 입시 때 풀었던 시 몇 구절을 생각나는 대로 주워 오거나, 거개 정현종 시인의 「섬」이나 유치환 시인의 「그리움」 등을 더듬더듬 외우곤 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섬 사이에 파도, 파도, 파도, 어쩌라고, 어쩌라고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짧게 선選한 이유를 묻고 다음 답시 낭송이 이어졌다. 당시 이렇게 저렇게 나는 100여 편의 시를 외우고 있었고, 그날 술자리와 후배와 그 후배가 고른 시의 분위기를 참조해, 그냥 내 기분에 따라 생각나는 시를 읊었다. 그중 가장 많이 읊었던 시가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이었다. 난 두 편의 시만 보지 않았다면, 그 알약을 집어 먹지 않았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 도회지 유학 생활에 키와는 반대로 웃자라고 있던 여린 영혼이 교과서에서 만난 두 편의 시 「님의 침묵」과 「낙화」는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말았다.
님은갓슴니다 아々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빛을깨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첨어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운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노코 뒤ㅅ거름쳐서 사라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운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머럿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슲음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々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 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슲음의힘을 옴겨서 새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밋슴니다
아々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한용운 「님의 沈默」(『님의 沈默』, 회동서관, 1926) 전문
* 블로그註: 옛 한글체 쌍자음(ㅺ, ㅼ)을 본인의 컴퓨터에서 살려 쓰지 못한 점. 양해바랍니다.
『님의 침묵』은 「군말」과 「독자에게」를 제외하고 본다면 총 88편의 연작시로 묶인 시집이다. 물론 「군말과」 「독자에게」를 시로 보아 89편으로 보느냐, 90편으로 보느냐는 학자들의 오랜 논쟁거리이지만 둘을 프롤로그, 에필로그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 시집은 조선어로 발간된 여덟 번째 개인 시집으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 이야기시이자, 님의 떠남과 부재, 귀환(정화하는 예감)의 길고 아득한 격절과 여정에 부려진 '부치지 않은 편지'이며 고백록이다. 뜻밖의 여정을 여는 「님의 침묵」에서 평생을 읽고 읽어도 그 깊이를 잴 수 없는 시인 "바람도업는공중에 垂直의波紋을 내이며 고요히떨어지는 오동닙은 누구의발자최임닛까"의 「알ㅅ수 업서요」를 거쳐, 처연하다 못해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암흑 무간지옥의 「苦待」를 지나 동터 오는 환희의 순간 같은 「사랑의 끝판」을 읽노라면 한 생生을 다 살아 낸 듯해 '알 수 없는' 회한에 젖는다.
굳이 시를 인용하여 회동서관 초판본의 원문 그대로를 옮겨 온 것은 모두에 말한 그 시절 내가 초판본의 원문 그대로 시를 읊었던 연유가 있어서이다. 1933년 조선어학회에 의해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기 전이니 나는 오히려 저런 정서正書가 시인의 의도가 더욱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의미를 취해 굳이 현대어로 바꿔 본디 소리를 잃는다면 적어도 시에서만큼은 또 하나의 불필요한 번역이라 생각했다.
하여 그때 나는 저 고어체가 주는 유려함과 뜻을 너머 소리로 구현되는 시인의 숨결에 매료되었다. 특히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단풍나무숩을 향하야√난'으로 읊기를 좋아했고, "적은길"에 "적은"을 부러 길게 힘주어 낭송했다. '나 있는'이 아니고 '나'라는 대명사로 나 자신을 투사해 낭송하고 싶었고, '작은'과 '적은'이 혼용되던 시대에 쓰인 "적은"이 지금 정본화 돼 통용되는 '작은'이 아니라 '많지 않다'는 뜻의 "적은"이 더 어울린다고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음법칙에 의해 사라진 소리가(價) "리별"과 "되야서"와 같이 새로운 신식 언어 발견과 수용으로 시를 쓴 시인이 남긴 '삑사리' 고향 충청도 사투리의 흔적에 흐뭇해했다.
만해 선생은 1926년 회동서관에서 시집으로 묶어 내기 전인 1925년 6월과 8월 백담사 오세암에서 각각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 원고를 탈고했다. 시인으로는 거의 시를 쓰거나 발표하지 않았던 그가 문학사의 돌밭에 가까운 『님의 침묵』을 쓰고는 한시漢詩 몇 편을 쓰거나 장편소설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미스터리하기만 하다. 가십성의 이야기가 돌기도 하고, 『기탄잘리』나 유마를 운운하는 고견이 있기도 하지만 선생이 도대체 왜 불꽃처럼 살별처럼 시를 쓰고 묶어 이 사바세계에 던져두고 표표히 시단에서 발길을 돌렸는지 만나 묻고 싶다.
1879년생이니 만해 선생은 「님의 침묵」을 딱 지금 내 나이에 썼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탈고의 순간과 시집에서 중년을 본다. 당시 평균수명 등을 생각한다면 노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55세에 결혼해 56세에 다시 영애를 안은 시인에게, 「님의 침묵」은 혈기와 분기에 가득 찼던 1919년 너머 도정의 역사 앞에 뱉어 낸 근 기침이자 홈(들뢰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크거나 작거나 높거나 낮거나의 분별이 없는 무장무애의 힘묵을 휩싸고 도는 월훈月暈이자 광배光背로 남았다.
'지금, 여기' 시단에 중년 시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아니 떠나고 있다. 환금성이 없는 예술을 지지하고 있기엔 슬하의 문제에 돌부처처럼 돌아앉아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아니 우리에게 그 침묵이 부재가, 이 슬픔과 사랑을 깨고 '다시'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외려 "누구의밤을 지키는 약한등ㅅ불"을 드는 침묵으이 중년들을 아니 중년의 침묵을 탓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을 염려할 따름이다.
다시 그 시절로,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고 싶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만해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김광석 때문이었다. 끝내 학전 공연을 보지 못한 나는 술자리에서 「님의 침묵」을 왼 날이면 택시를 잡아타고 성북동으로 갔다. 밤늦어 잠긴, 영애의 문패가 걸려 있던 '심우장'에 소주 한 병을 두고 큰절을 한 번 올리고는 집으로 더벅더벅 걸어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나는 여전히 시인이 조선 청년의 기개와 함께하리라며 심었다는 향나무를 매만지며 말을 삼킨다. 나는 이제 무슨 시를 쓰나. ▩ (p.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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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3-봄(28)호 <권두essay>에서
* 전형철/ 200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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