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박두진 시집 『해』
김경식/ 시인
장서藏書 속에서 단 한 권의 애장서를 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장서는 대략 2만 권쯤이나 되기 때문이다. 장서의 절반은 시집인데 1970년대 이전 시집이 약 200권쯤이다. 오래된 시집이 모두 귀중본은 아니지만 유독 이들 시집에 애정이 간다. 그중 30여 권은 귀중본으로 생각하면서 가끔 확인하곤 한다. 이 중에서 유독 의미 있는 시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1949년 <청만사>에서 발간된 박두진(1916~1998, 82세) 시집 『해』 초간본이다. 우선 이 시집에는 박두진 시인이 직접 붓으로 쓴 명필 서명이 있다. 또한 그의 첫 시집이며, 대표시 「해」가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이 된 시 「해」는 조국의 해방을 상징한다. 이 시집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다.
나는 '해방解放'이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흔들린다. 일제강점기 말(1943~1945) 부친이 아오지탄광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2년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부친의 친구들은 해방이 되어서도 돌아올 수 없는 분들이 많았다. 강제 징용의 현장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부친에게 '해방'은 기나긴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적 단어였다.
해방 직전 순결하고 맑은 영혼을 지닌 박두진은 하늘을 지향하고 있었다. 눈이 부신 태양빛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제국주의 칼날은 오히려 그가 좋아했던 해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상징인 '해'를 노래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조국이 없었다. 식민지 청년이 당해야 했던 정신적 고뇌는 고통이었다. 1946년 해방의 감격을 '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당시의 고난을 자유와 희망의 상징어 '해'로 승화했다. 결백하고 지성적인 청년은 하늘의 태양을 그리워했다. 삶과 시가 일치하였기에 「해」는 민족의 등불처럼 여겨졌다. "해야, 솟아라, 말갛게 솟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그의 「해」는 우리 민족의 태양이 되어 하늘에 떠 있다. 아직도 시련의 밤길을 가는 사람에게 삶의 길을 평화롭게 인도하고 있다.
박두진의 「해」는 1946년 5월 ⟪상아탑⟫에 발표되고, 1949년 시집으로 출간되며 표제가 되었다. 이 시 발표 당시 문학평론가 조연현(1920~1981)은 한국시의 절정을 작품화했다며 극찬했다. 「해」는 해방 후의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수립과 민족의 환희를 노래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에 시「해」가 가요로 만들어져 크게 유행하여 유명시가 되었다. 발문은 김동리가 썼으며, 책 장정은 하드커버로 김용준(1904~1967)이 맡았다. 김용준은 책 장정가로도 유명하다. 이태준(1904~ ?)과 매우 친했으며, 1948년 수필집 『근원수필』을 출간했지만, 6 ·25전쟁 당시 서울대 예술대학 학장 재임 중에 월북했다.
북한에서 김용준은 <조선미술가동맹>에 가입하고 활약했지만, 정지용(1902~1950)과 이태준 같은 전통 모더니즘 계열의 순수 예술인이었다. 그러므로 월북한 그가 좌익적인 사상에 익숙하지 못하여 평탄한 삶을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북한은 태양을 가리고 암흑에서 일당 독재를 도모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청록파 시집 『청록집』, 김동리의 소설집 『무녀도』, 정지용 시집 『지용시선』 등은 김용준이 표지를 장정한 책이다.
이번 봄에는 다양한 고통으로 절망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박두진 시인의 시 「해」의 감격이 있기를 기원한다. ▩ (p. 11)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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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3. 4월(258)호 <고전에게 길을 묻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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