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외 2편
김일연
연필을 깎아주시던 아버지가 계셨다
밤늦도록 군복을 다리던 어머니가 계시고
마당엔 흑연빛 어둠을 벼리는 별이 내렸다
총알 스치는 소리가 꼭 저렇다 하셨다
물뱀이 연못에 들어 소스라치는 고요
단정한 필통 속처럼 누운 가족이 있었다
-전문(p. 14)
A Star
An Sonjae
Father used to sharpen pencils
Mother used to iron military uniforms late into the night
and a star sharpening graphite-black darkness came down
into the yard.
I was told that the sound of bullets grazing past was
exactly the same.
A silence terrified by a water snake entering a pond and
the family was there as if lying in a tidy pencil case.
-전문(p. 15)
해설> 한 문장: 화자의 유년시절이 투영된 한 편의 시 속에 "흑연빛 어둠"이 내린 마당과 "연필을 깎아주시"는 아버지, "군복을 다리"는 어머니, "필통 속처럼 누운" 가족들의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와, "총알 스치는 소리", "물뱀이 연못에 들어 소스라치는 고요" 같은 다양한 감각들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 인화되고 있다. 정적 속이지만 정지되지 않은 고요가 이 시를 마치 암전 속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풍경처럼 실감 나게 한다. 딸의 연필을 깎아주는 직업군인 아버지와, 지친 하루의 끝에서 다정히 삶을 맞대는 가족들 뒤로는 "밤늦도록 군복을 다리"는 어머니가 꿋꿋이 버티고 있다. 사랑의 배후가 되는 사랑, 모든 사랑의 근원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김일연의 시세계의 또 하나의 간절한 한 축이 되고 있다. (p. 180) (류미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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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짐 빼고 집 내놓고
용돈 통장 해지하고
내 번호만 찍혀 있는
휴대전화 정지하고
남기신 경로우대증 품고
울고 나니 적막하다
-(p. 12)
A Daughter
Taking her things and leaving the house,
after closing the bank account,
terminating her mobile phone
where only my number was saved,
pocketing the senior pass I'd inherited
feeling lonely after tears.
-전문(p. 13)
해설> 한 문장: 굳이 한국의 전통적인 효사상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보편의 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인생의 소중한 것은 항상 늦은 후회로 오기 마련인데, 시인은 이런 뒤늦은 깨달음을 또다른 시편에서 "헛꽃"에 비유하기도 했다. 한국 속담 중 "내리사랑만 있고 치사랑은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희생 가능한 위대한 사랑이 영속되는 방법일 것이다. (p.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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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는 딸에게
너와 아가 모두 무탈하게 소원하며
아마존의 유모차를 마천루의 정글로
열 달을 고르고 골라 실한 것으로 보낸다
-(p. 42)
To My Daughter in New York
Hoping thet you and the baby are okay,
I'm sending a stroller from Amazon to the skyscraper
jungle city,
a stroller that I spent ten months choosing, a sturdy one.
-(p. 43)
해설> 한 문장: 짧은 시편 속에서 '언어예술로서의 시어의 함축성, 중의성이 자연스럽고도 세련된 방식으로 발휘되고 있다. 현재 뉴욕에 사는 딸이 출산을 앞두고 있음을 "무탈하길 소원"한다든가 "유모차"와 "열 달"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는데, 그 거주지가 하필 미국 최대이자 세계적 도시의 하나인 뉴욕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아마존"은 미국의 온라인 쇼핑몰 이름이기도 하지만,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정글"이 존재하는 열대우림의 이름이기도 하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야생의 땅과 인간 소외의 현장인 살벌한 도시의 삶을 절묘하게 겹치며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해내고 있다. "실한 것"으로 열 달 동안이나 고르고 또 고르는 지극한 모정을 어떤 자녀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후대에 이어지는 방식으로 완성될 뿐이다. 한편, 이 시집의 제1부가 가족의 정과 혈육에 대한 기억, 연대기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것은 김일연 시인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떤 깊은 예술도 '뿌리'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 없이는 깊이를 획득하기 힘들다. 그것이 혈육과 관계된 것이든 공동체의 그것이든, 근원에 대한 뿌리 깊은 자각과 성찰만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관계로부터 존재를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바람을 잊는 것처럼, 뿌리가 뿌리를 잊는 것처럼. (p. 181-182)
* 블로그 註: 영역 해설 및 모든 英文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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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대역 시조선집 『세상의 모든 딸들』에서, 2023. 4. 12. <서울 셀렉션> 펴냄
* 김일연/ 1955년 경북 대구 출생, 1980년 『시조문학』에 시조 부문 추천 완료로 시조시인이 됨, 시조집『빈들의 집』『서역 가는 길』『저 혼자 꽃 필 때에』『달집 태우기』『명창』『엎드려 별을 보다』『꽃벼랑』『너와 보낸 봄날』『깨끗한 절정』, 동화집『하늘발자국』/ 국내외에 시조를 알리는 작업으로 <시조튜브>를 개국하여 운영하고 있다.
* 안선재(번역)/ 1942년 영국 출생,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후 1969년에 프랑스 Taize 공동체에 입회, 1980년 한국 입국,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정호승 · 김승희 · 이정명 등의 시와 소설을 60여 권 이상 번역, 2015년 한영 약국 관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명예 MBE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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