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사라진 남자 외 1편/ 이미화

검지 정숙자 2023. 5. 3. 17:42

 

    사라진 남자 외 1편

 

    이미화

 

 

  잠실역에서 잠실나루역으로 들어오면

  밖은 사라진다

  사라진 밖에서 한 남자가 사라진다

  지하철은 오래 정차했다

  역원들이 선로에 뛰어든 남자의 주변을 치우고 있었다

 

  삼십 분 동안 지하철이 웅성거렸다

  누군가의 치워진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빙하의 물기가 묻어 있었고

  물은 잠실나루역에 고여 있었을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그는 다른 물가에 다다르리라

  제 꼬리를 물고 다시 도착하는 순환선을 타지 못할 것이고

  이 역에 다시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하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는 것을 묻는 질문처럼 수습이 끝난 모양이었다

  갑자기 거센 물살을 만난 듯

  지하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문(p. 106-107)

 

 

       ---------------

    바람을 품다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

  바람이 먼 구름을 끌어올 때

  변태성 기후에 이마를 닦인 적 있다

 

  그런 날은 오래전 죽은 이들이

  솔기처럼 줄줄 뜯겨 나왔다

  키는 크지 않을 것 같은 낮

  키가 크지 않았으므로 희미해지거나

  뚜렷해지는 구름들을 따라갔다

  해가 종종 실종되었다

  나뭇가지 끝을 빌려 뺨을 만져 보았다

  잠은 보폭보다 짧아 자꾸 미끄러지는 벼랑만 반복해서 꾸었다

  할아버지 없이 아버지가 태어나고

  내가 없이 아버지가 태어났다

  자주 전생이 입원하는 날들이었다

  죽은 이들이 걷는 거리처럼 어둠이 겹치고

  불빛들은 빨리 물들었다

 

  밤 속의, 밤 속의, 밤 속의 침묵은 너무 무거워 창틀에 눈동자를 얹어 놓고 발성 연습을 했다

 

  결핍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이었다

  아직도 빌려 쓸 나는

  무수히 많아 얼굴만 바꾸는 역할놀이는

  이제 지겨워

 

  무릎 사이로 아버지가 빠져나가고

  엄마의 치마 사이로 들어가

  기차 안처럼 함께 앉아 있는 시간

  홀씨가 잔뜩 묻은 바람이 되고

  그림을 고르듯 불빛에 고른 것이 지금이라면

  다행히 눈꺼풀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않아 좋았다, 나는

    -전문(p. 26-27)

 

    ---------------

   * 시집 『비가 눈이 되고 눈사람이 되고 지나친 사람이 되고』에서, 2023. 4. 30. <파란> 펴냄

   * 이미화/ 2011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몽당연필 심법(心法) 외 1편/ 박진형  (0) 2023.05.04
다비/ 박진형  (0) 2023.05.04
바벨의 노래/ 이미화  (0) 2023.05.03
소나무를 아우라 불렀다 외 1편/ 나석중  (0) 2023.05.01
밀양/ 나석중  (0) 2023.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