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자고 가면 안 될까요? 외 1편/ 조정인

검지 정숙자 2023. 3. 15. 03:21

 

    자고 가면 안 될까요? 외 1편

 

    조정인 / 전미화 그림

 

 

  나는 분홍 코를 가진 길고양이다.

 

  그 집엘 간 건 그날이 세 번째였고

  마지막이 되었다.

 

  심장이 얼 것 같은 겨울 저녁이었다.

  교회 담장 아래서 나는 검정 스타킹 누나를 기다렸다.

  분홍 코, 아롱이! 불러 주는 누나를 따라가면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실은 그게

  종일 내가 먹는 것의 전부다.

 

  빌라에 거의 아 오자 나는 문 앞에 먼저 가 서 앉았다.

  누나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렸다. 폴짝폴짝

  계단을 뛰어오른 나는 501호 현관 앞에 멈췄다.

 

  "아롱이 왔구나. 조금만 기다려."

  누나네 엄마는 매번 밥과 물을 차려 준다.

  현관 안쪽 실내엔

  고양이 두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계단에 놓인

  종이 박스를 발견했다. 가슴이 뛰었다.

 

  밥을 다 먹은 나는 뜸을 들이며

  누나네 엄마와 박스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저 상자에서 자고 가면 안 될까요?"

  내 말을 알아들은 누나네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왔다.

  사뿐사뿐······ 가볍고 명랑한 건 나의 특기다.

     -전문(p. 7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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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가게 앞엔 이제 울긋불긋한

  전단지만 어지럽게 날린다.

 

  '저희 가게를 찾아 주신 선생님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낡은 셔터엔 이런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골목 입구 조그맣고 납작한 슈퍼마켓은

  내 친구 민이네 가게였다.

 

  이제는 굳게 문이 닫히고

  '민이네 슈퍼마켓' 간판만

  왼쪽으로 기운 채 혼자 남았다.

 

  민이네 아빠는 털 빈, 왼쪽 소매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내가 모르는 먼 마을, 민이 사는 그곳에도

  지금쯤 코스모스가 한창인 걸까?

    -전문(p. 92-93)

 

   * 블로그註: 그림은 책에서 감상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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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시집 『웨하스를 먹는 시간』 에서/ 2021 10. 11. <문학동네> 펴냄

   * 시) 조정인/ 1998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사과 얼마예요』『장미의 내용』『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동시집『새가 되고 싶은 양파』

   * 그림) 전미화/ 동시집『몽당연필도 주소가 있다』(그림 & 글), 그린 책『달려라 오토바이』『너였구나』『그러던 어느 날』『섬섬은 고양이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