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묻지 않는 묵사발
정채원
한밤중보다 더 고요한 한낮
부엌 하수구에서 크르렁 크르렁 소리가 난다
물을 버린 적 없는데
무언가 버려지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의 몸부림 같은
어느 먼 별에서 누가 울고 있나
미끄러운 손이 놓쳐버린 약병 같은
끊어진 목걸이의 눈알 같은
느닷없이 부서진 목숨들이
묵처럼 엉겨 붙는 공기를 깨뜨리고 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자들의
묵사발 같은 평화와 고요를 던져버릴 듯
축제의 날, 길거리 오디오에 휘파람을 날리다가
한순간 엉켜버린 시간과 공간
날벼락에 지금 여기를 떠나가는, 그런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목숨들의 비명
아니야, 아니야
발이 닿지 않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엄마, 난 지금 죽고 싶지 않아요
여보, 애들도 어린데 아직은 나 할 일이 너무······
예고 없는 암전!
별빛이 갑자기 휘어져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빛들이
하늘에서 얼다가
바다 위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새아침의 태양은 어김없이
시력 잃은 별들을 다 지우고
여름에도 서리꽃이 피고
화살 꽂힌 심장에서 녹아 이슬이 되고
낯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누군가의 아우성소리를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도
모든 울음소리가 다 들리는 화창하고 고요한 한낮
하수구로 함께 빨려 들어가는 사람은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전문(p.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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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엠포엠』 2023 - 봄(97)호 <시인을 만나다 79/ 신작시> 에서
* 정채원/ 1996년 월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나의 키로 건너는 강』『슬픈 갈릴레이의 마을』『일교차로 만든 집』『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등, 한유성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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