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_2022, 제18회 김삿갓문학상 수상자 : 시와 시론>
신작시 1편)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26
정숙자
귀뚜라미야, 너는 날개로 울고 날개로 노래도 부른다지? 네 날개는 공후箜篌보다도 아름답구나. 친구네 풀밭 찾아갈 때도 날개가 널 데려다주잖니! 날 수만 있어도 아름다운데 피리까지 들어있다니! 이 가을에 네가 없다면 얼마나 ᄏᆞᆷᄏᆞᆷ했을까. 내 삼경, 네 곁에서 검정을 지우는구나. (1990. 8. 18.)
귀뚜리야, 귀뚜ᄅᆞ미야
난 어제 ‘눈물점의 협착’
수술을 받았단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할 때
참아버릇한 탓으로 막혀버린 게 아닐까
수술받는 내내 뒤늦은 강둑 흔들렸단다
한 계절만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너처럼 그래야 했을 것을
서른 ᄆᆞ흔 쉰을 넘어도
슬픔 앞에선
한낱 아이일 뿐이었는데,
-전문-
시론 1편)
나의 독서 패턴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종족 보존을 하게 된 원인을 꼽자면 ‘글자의 발명’일 것이다. 막대기로 셈하고 기억을 증명하던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천 년이 걸렸지만, 그 세월 속에서 터득한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수 있었던 수단은 오로지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혜들은 바위에 새겨지거나 죽간竹簡으로, 책冊으로 전수되는 등 지금은 e-book으로 발전, 간행되고 보관되며 소비되는 실정이다.
각계각층의 변화와 발전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필자가 태어나 한글을 터득한 1950년대만 하더라도 책만이 책이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따르릉 울리던 전화도 우체국에 가서 신청해야만 서울의 오라버니와 통화할 수 있었으니, 21세기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그 더딤의 문화가 상상 초월로 느껴질는지도 모른다. 이러저러한 사정이 불과 50년 전후의 사실이다. 농촌과 수도 서울의 광경은 좀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현재는 어떠한가. TV와 각종 전자기기가 방방곡곡 배치되어 국내 뉴스는 물론 세계 뉴스까지도 실시간으로 보급된다. 한때 첨단이었던 라디오와 녹음기 카메라 등은 휴대폰 밖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그 모든 발전의 중앙에 ‘기록’이 있었으니 기록이 기록을 갱신/입증하며 쌓아온 싱크탱크의(think tank)의 결과라 할 것이다. 당연히 기록은 ‘글’이므로 글이야말로 신도 놀랄만한 종속과목강문계를 가로질러버리는 빗장이 아닌가.
위와 같은 맥락도 글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해도 스승의 스승님 역시 책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쌓았을 것이고. 초동급부樵童汲婦에 불과한 필자 역시 한 권 두 권 읽는 사이 국사며 세계사에도 눈이 뜨이고 인지/인식도 조금씩 깊이와 넓이의 눈금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개성도 생겼을 테고, 미분/적분 등 공식은 잊었을지라도 용어나마 기억하는 형편이므로.
그런저런 일련의 과정을 처음부터 알고 책을 사귀었으랴만, 이제 한 생을 돌이켜보니 물경 ‘책’의 공헌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 집안을 둘러봐도 생필품 외에 눈에 띄는 것이라곤 책, 책, 책뿐이니 필자가 무엇에 의지해 이 삶을 노櫓 저었는지는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백가쟁명의 문단에서 허약인 필자의 기도문은 마땅히 ‘나무관세음南無觀世音’과 아울러 ‘나무관세책南無觀世冊’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얘기가 여기까지 온 바에야 필자의 옛 시절 독서 패턴을 잠깐 꺼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시집은 띄엄띄엄 읽지 않고, 몇 편씩일지라도 항상/매일 읽었다. 국내외 시집을 두루두루 말이다. 그리고 세계문학과 동서양의 경전, 철학 서적을 읽었는데, 그 책들은 두께가 만만치 않아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한 권씩 돌아가며 읽어야 했다. 그렇게 엇섞어 섭렵하다 보니 자신의 성향이 무엇인가를 감지/인지하기에 이르렀다.
등단 후 30여 년, 현재는 어떠한가? 실존철학보다는 언어철학을, 본인이 읽고 싶은 책보다는 보내오는 책을, 한 계절에 50종이 넘게 들어오는 잡지와 시집을 읽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부여하고 있다. 철모르던 시절, 웃어른들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젊을 때 반드시 고전을 읽어라”시던 그 뜻! 몇 권에 불과하지만, 등단 전후로 한가로이 탐독하지 않았던들, 지금 같아서야 그 많은 시간을 어찌 꾸어올 수 있었겠는가.
싱싱하게 살아 도도히 꿈틀거리는 현장의 흐름을 읽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흔히 ‘판세’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거니와 책을 읽는 것, 특히 작금의 간행물을 읽은 것이야말로 판세에서 말하는 ‘판’을 읽는 일이다. 그는 즉 나 자신을 바로 알기 위함이며, 어떤 글을, 어떻게, 왜 써야 하는가를 짚어낼 지도를 보는 바와 다르지 않다. 이때의 요점은 ‘합류’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 발 내딛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리라.
시 한 편에 관한 <시론>으로서는 이 원고가 좀 무겁지 않았나 싶다. 30년을 건너뛴 원고를 1연에, 현재 시점을 바로 뒤이어 대면시킨 시고詩稿이고 보니 그 간격의 이면을 잠시 열어 보이고자 했음이다. 필자는 요즘 양자 물리학에 접근, 이해와 공감의 폭을 좁혀가고 있다. 양자 도약과 파동의 조우가 아니었다면 이런 작품의 구도는 착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디선가 읽었다. 물리학 이론을 문학에서 가장 먼저 수용한다고.) ▩ (p. 시 44-45/ 론 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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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온문학』 2022-겨울(34)호 <특집/ 2022. 제18회 김삿갓문학상 수상자_시와 시론>에서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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