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바다』 2022-가을(36)호/ 내 시집 속의 가을 시; 추천인- 안영희 시인>
액땜
정숙자
죽은 자는 울지 못한다
아니다 죽은 자는 울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 마당에서) 죽은 자는 산 자이기 때문이다. 좀 더 푸른빛 내뿜어야 할 벙어리이기 때문이다. 몇 곱은 더 실다운 삶을 울어야 할 피리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목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접목할 수도 분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언어는 석상의 눈물에 불과하지만
석상의 눈물은 드넓은 깃발 흔드는 팔과
그 깃대 아래 모인 발들의 쾌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뛸 수도 없는-죽은 자들
날 수도 없는-죽은 자들
길 수도 없는-죽은 자들
전철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 병, 아무래도 저 병은 무진장 신났나 보다. 바다 하늘 들판이 꼭 바다 하늘 들판이어야 할 까닭이 뭐냐 마구 구른다. 킬킬킬킬킬 깨진 얼굴 비친다. 난생처음 자유다 비웠다 한다. 덜덜 턱 멎고 구른다.
간신히 태어났고
겨우 살았고
가까스로 죽어가는 자들
그러나 살아있는, 저 빈 병 바라보는 관자놀이들
이튿날 아침이면 창틀에게 신발에게도 타이른다
더 험한 탈 만났을 수도 있어
진짜! 더 새카만 털 대낄 수도 있지
그리고 또 하루 않는다, 울지
- 시집 『공검 & 굴원』(미네르바, 2022)에서
詩作 노트> 전문: 오늘은 2022. 8. 6일. 열흘만 지나면 『공검 & 굴원』이 출간된 지 꼭 석 달이 된다. 이제야 발송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감사와 기쁨으로 한 권 한 권 ‘받으실 분’의 성함과 주소까지도 만년필 잉크를 갈아 끼우며 사인했다.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도“책을 내는 것은 노다지 기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평가야 차치하고라도 우선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건 어떤 면에서든 축복이요 은혜임이 분명하다.
그간 내 시집을 읽고 보내온 전화나 문자, 편지, 이메일, 카톡 등에 따르면 괜찮은 평을 받은 제목은 중복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분만이 「액땜」이 가장 ‘좋았다’는 평을 주셨기에 오늘은 그에 대한 시작 노트를 다듬어 보려 한다.
일단, 발상의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저 작품을 썼던 오륙 년 전 시간을 방문한 결과, 삶에 뒤엉킨 고통과 그로 인한 우울감에 싸여 있었던 것 같다. 아직 (미망인으로서)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플라톤의 말대로 “이 세상은 감옥이며 어떤 인간도 자기 스스로 석방시킬 수 없다”는 명제를 회의하던 배경이 떠오른다. 사실인즉, 그때뿐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는 늘 내 안팎에 세워진 병풍이 아니었던가.
그 무렵, 마침 나는 전철을 탔고, 좌석이 헐렁할 정도로 비어 있었는데, 유리병 하나가 바닥에 버려진 채 이리저리 뒹굴다가 턱! 하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요란하다 싶을 정도의 소음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내용물을 다 비워버린 병, 어딘가 서 있지 않아도 되는 병, 마지막 껍질마저도 우주의 율동에 맡겨버린 병, 아무도 아까워하지 않는 병, 온 세상의 관심에서 벗어난 병, ‘아! 저 병은 웃고 있구나, 나는 자유다, 라고! 이제 깨져도 좋아, 라고! 이제 정말 살지 않아도 돼! 라면서’
그렇게 그 병을 바라보며···, 지나온 모든 고통은 더 큰 고난의 ‘액땜’이었음을 인지/인식하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함부로 울지 않으려는 다짐을 자신의 내면에 심기도 했다. 이 한 편을 선택해 답신을 보내주신 분은 어떤 느낌으로 이 시를 접하셨을까? 그러나 그에 대한 궁금증은 묻어 두기로 했다. 여지餘地란 바로 그렇게 비워두는 것이겠거니. 일 년 중 제3분기에 해당하는 가을. 나는 지금 생애의 가을을 소요하는 중이다. 붉게 물들고 마를 만하고, 좀 더 쓸쓸하고 슬플 만하고, 좀 더 따뜻하고 맑을 만한, 70대 초입 그녀의 시 「액땜」······. ▩ (p.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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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바다』 2022-가을(36)호 <내 시집 속의 가을 시: 추천인- 안영희 시인>
* 정숙자/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공검 & 굴원』『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질마재문학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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