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창> 中
정신의 방목과 몸의 유목을 생각하며(부분)
김선굉/ 시인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산업화와 모더니즘 시대를 지나오면서 우리의 사고는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분업화되었다. 그 결과 우리의 일상은 풍요로워졌을지 몰라도 상상력의 범주는 볼품없이 좁아지면서 파편화되어버린 경향이 있다. 예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같은 범주의 장르 안에서도 각자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학은 시인, 소설가, 수필가, 희곡가, 평론가 등으로 나누어지고, 시는 시와 시조로 나누어지고, 또 시는 정형시와 산문시로, 나아가서는 서정시와 실험시, 참여시 등으로 나누어져서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문학을 중심으로 거칠게 진단해본 이런 현상은 다른 장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장르의 작가는 장르 속의 장르로 세분화된 경계 안에서 최고의 작품을 창작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이 어떤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 작동하는 한 시대 정신을 반영한 최고의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신의 방목은 최상의 창작 에너지인 상상력이라는 말을 자신이 설정한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다른 세계에서 자라고 있는 풀을 뜯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문학은 미술을 향하여, 미술은 문학을 향하여, 이런 식으로 장르 상호간에 상상력의 말을 방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방목은 다른 장르를 향한 상상력의 이동이다. 방목을 다른 장르에 대한 이론적 탐색이라고 한다면 다음 단계는 실제로 다른 장르의 원작 앞에 서고 작가와 교류하는 몸의 유목이다.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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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시 전문지 『사이펀』 2022-겨울(27)호 <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 신작시> 에서
* 김선굉/ 1952년 경북 영양 출생, 1982년『심상』으로 등단, 시집『술 한 잔에 시 한 수로』『철학하는 엘리베이터』『나는 오리 할아버지』외, 공동시집『머리를 구름에 밀어넣자』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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