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한민족 문학과 윤동주의 국적 문제(전문)/ 김영철

검지 정숙자 2022. 10. 15. 02:47

 

    한민족 문학과 윤동주의 국적 문제(전문)

 

    김영철

 

 

  민족문학의 개념과 범주를 설정할 때, 일반적으로 3속三屬주의가 기본 전제가 된다. 즉 어느 나라 사람이, 어느 땅에서, 어떤 언어어로 작품을 썼는가 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 한국문학의 경우 '한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쓴 작품이 한국문학이 될 것이다.

  유이민 1세대 문학은 비록 북간도에 살긴 했으나, 우리 국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로 쓴 작품이라 의당 국문학에 포함된다. 문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중국 국적으로 편입된 조선족 문학이다. 국적이 아예 중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과연 그를 국문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인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조선족 문학을 3속주의로 규정해 볼 때, 속인屬人과 속언屬言은 해당되지만 속지屬地라는 조건이 부합되지 않는다. 즉 조선족 문학은 한국인의 후예가, 한국어로 문학을 하지만, 중국 땅에서 중국 국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p. ~12)

  한국에서는 조선족에 대해 '조선족'이라는 명칭 외에도 '재중동포', '중국동포', '중국교포'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는 '단군의 후예'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한국인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이 더 강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동포, 교포'라는 말 자체가 단지 삶의 터전이 외국일 뿐이지 민족은 한국인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 국적이 부여되지 않은 일본 거주 한국인을 '재일동포'로 부르는 경우와 흡사하다. 결국 중국 조선족 문학은 중국 동포문학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넓은 의미의 한민족 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한국문학과 한민족 문학의 개념이다. 한국문학은 의당 3속주의가 적용되는 우리의 국문학이다. 한국 땅에서 한국국적의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문학인 것이다. 그에 비해 한민족문학은 타국 땅에서 쓰인 작품이라도 한민족의 후예 즉, 한국인 동포들의 문학을 지칭한다. 말하자면 한민족문학은 한국문학뿐 아니라 해외 동포문학까지도 포함한 광범위한 민족문학인 것이다.

  이렇게 한국문학이 아니라 한민족 문학의 범주를 설정할 때 연변의 중국동포 문학 뿐 아니라 일본교포, 재미동포, 우즈벡 고려인 문학 역시 한민족 문학에 포함된다. 이회성, 유미리 등 일본교포 작가의 경우, 대부분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회성은 『다듬이질하는 여인』으로, 유미리는 『가족 시네마』로 각기 아쿠타가와 상을 획득하였던 바, 두 작품이 다 일본어로 쓰인 작품이었다. 1964년 『순교자』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떠오른 재미 작가 김은국도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동포작가들의 경우 대부분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의 언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한민족의 후예라는 점에서 비록 한국문학은 아니지만 한민족문학인 것은 분명하다. (p. ~13)

  그런데 조선족 문학은 직접 한국어로 작품을 쓴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 러시아, 미국 작가들의 작품과 크게 구별된다. 더구나 그들 작품의 내용이 대부분 조선인의 입장에서 조선문화나 생활 관습, 조선인의 정서 들을 바탕으로 해서 쓰고 있다는 점도 한민족 문학으로서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측면이다. 무엇보다 문학이 언어예술인 만큼, 어떤 언어로 글을 쓰느냐가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다. 언어가 단지 표현매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을 관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민족 언어에는 한민족의 민족혼이 스며있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3속주의 조건 중 속언주의가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평가돼야 한다. 비록 중국 땅에서, 중국 국적을 갖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민족의 후예로서, 한국어로 작품을 쓰는 조선족 문학은 포괄적으로 한민족 문학으로서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 문제는 한국문학이 좁은 민족문학의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세계문학, 글로벌(global) 문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이다. 한국문학은 단지 3속주의에 얽맨 한국문학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좀더 폭넓은 시야와 지평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한국문학의 세계문학화, 글로벌문학화를 위해서는 한민족 문학의 퍼스펙티브(perspective)가 확장돼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유이민 문학, 나아가 해외동포 문학에 대한 수용과 평가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p. ~14)

  중국 정부는 근자 들어 윤동주 시인을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공작을 펼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생가를 대대적으로 복원한 바 있다. 생가에 윤동주 박물관을 짓고, 시비詩碑를 곳곳에 조성하여 대규모 윤동주 기념공원을 조성한 바 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생가 입구에 버젓이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 적힌 커다란 비석을 세워 놓았다. 날짜는 2012년 8월 8일이고, 조선족 문인대표 명의로 되어 있다. 중국 정부가 조선족 문인들을 앞세워 생가 복원, 박물관 설립을 명분으로 중국 시인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주변에 윤동주와 생애를 같이한 송몽규의 집도 대대적으로 복원시켜 놓았다.

  윤동주의 산소에도 기존의 묘비 외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는데 그 역시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명시해 놓고 있다. 기존 시비가 '민족시인 윤동주지묘'라고만 표기되어 있음에 비해 이 묘비에는 분명히 중국 조선족 시인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묘비를 구태여 세운 것이 바로 윤동주를 중국 시인으로 각인시키기 위한 공작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일종의 '윤동주 공정'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즉 윤동주를 중국시인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공정인 것이다.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기는 힘들기에 조선족 문인들을 앞세워 이런 작업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윤동주는 중국 조선족 시인인가. 조선족은 국적이 중국인인 만큼 윤동주가 조선족 시인으로 규정되면 결국 중국 시인이 되는 것이다. 윤동주는 주지하다시피 1917년 12월 타국 땅인 만주국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에 일본 후쿠오까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28세)한 비극의 시인이다. 지금 그의 육신은 조국 땅이 아닌 중국 용정 땅에 묻혀 있다. 그는 분명 한국인 신분으로 살다가 한국인의 몸으로 생을 마감한 시인이다. 그런데 돌연 중국 시인으로 변신해 버린 것이다. 죽어서 국적조차 한국이 아닌 중국으로 편입된 것이다.

  한국에서 민족 저항 시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윤동주가 중국 시인으로 규정되면 우리는 한 명의 민족시인 윤동주를 잃게 되는 결과를 빚는다. 이는 윤동주 한 시인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떠나 한국문학사, 민족문학사로서의 큰 손실이자 공백을 초래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p. ~15)

 [ * 공정公定: 1정부 또는 산하의 공공 기관에서 정함. 2.일반의 공론에 따라 정함(다음 검색). ※블로그 참고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 시인으로 편입되는 동기가 되는 조선족 문학, 조선족 문인의 범주 문제를 엄격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윤동주는 과연 조선족 시인인가. 이것이 이 문제를 푸는 문제의 관건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조선족의 개념과 범주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은 우리와 다르게 주민등록증에 해당되는 신분증에 어느 민족 출신인가를 밝히는 항목이 있다. 현재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은 신분증에 분명히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부여받고 있다. 곧 '조선족'은 중국 국적의 소수민족임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족'이란 명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서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1949년 이전에는 이런 명칭이 사용된 적이 없다.

  '조선족朝鮮族이라는 용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족은 중국 내에 거주하고 있으며, 과거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한인들에게 중국 국적을 부여하여,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공식화하면서 탄생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이전, 중국 내에 있는 한인들에 대한 호칭은 다양하였다. '유이민', '조선인', '재만한인', '재만조선인', '조선인교민', '고려인'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유이민'으로 호칭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문학도 '유이민 문학'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해방 후 중국과 국교가 단절되고, 교류가 중단되면서 조선족의 생활이나 문학, 예술 등은 논외의 대상이 되었다. '죽의 장막'에 갇혀 정치, 외교적으로나, 문화 및 학문적으로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p. ~16)

  그러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의 유입이 시작되고, 교류가 활발해지는 19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중국 거주 한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중국동포', '중국교포', '재중동포', '재중한인', '조선족' 등 입장 차이에 따라 다르게 불려 왔으며, 통상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재중한인' 또는 '조선족'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그들의 생활상生活相은 물론 문화, 생활 전반에 걸쳐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문학에서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중국 조선족 문인들과 한국 문인들 사이에 교류가 증진되면서 연변문학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조선족은 중국에서 두 개의 민족자치 지역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고 다른 하나는 길림성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다. 2000년에 실시된 중국 전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조선족 총 인구수는 1,923, 842명으로, 주로 길림성(1,145,688)명, 흑룡강성(388, 458명), 요녕성(241, 052명), 내몽고 자치구(21,859명)에 분포되어 있다. 

  다음으로 조선족 문학의 개념과 범주를 보자. 이에 대해서 길림대학교 윤윤진 교수는 『중국조선인 문학연구에 나서는 몇가지 문제』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개국한 1949년 전의 문학은 '중국 조선인 문학'이라고 지칭해야 하며, 그 후의 문학은 '중국 조선족 문학'이라고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조선인 문학은 조선민족 문학의 갈래에서, 그 이후의 문학은 중국 소수민족 문학의 갈래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윤윤진은 조성일 · 권철 주편으로 된 『중국조선문학사』 등에서 사용된 '중국 조선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면서, 그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까지는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건국 전후의 중국 내 조선인 문학에 대해서 "광복 전 문학을 조선족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뿐만 아니라 사실에 접근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조선족이란 호칭이 한반도에 거주하지 않은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인을 호칭하는 대명사로서 그 전 시기와는 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여건을 파악할 경우 사정은 더 자명해지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p. ~17)

  그는 문학의 귀속 문제를 국가 개념에 기초하여 범주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1949년 이전은 중국 조선인들이 중국에 살고 있었지만 엄연히 한국 국적을 가졌음을 고려한 것이고, 1949년 이후는 중국 국적을 갖게 되었음으로 중국 문학 내 소수민족의 문학으로 보자는 견해이다. 이를 구별하기 위해 '조선인'과 '조선족'이라는 명칭으로 구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윤윤진의 구별은 기존 조선족 문학사의 기술적 오류를 교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중국조선족문학사』(조성일, 권철) 등 기존의 조선족 문학사에서는 안수길이나 현경준, 김조규 등 건국 이전 이주민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으며, 한국이나 북한에 나간 작가들의 문학적 업적을 배제하거나, 소홀히 다루어 왔다. 이는 그들이 중국국적의 신분으로 활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족 문학사는 중국국적의 문인들을 중심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학사는 조선족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의 문인으로 보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윤윤진 역시 해방 전 중국에 이주한 유이민들의 문학을 '조선인' 문학으로 규정하여 '조선족' 문학의 전단계로 감고자 했던 것이다. 윤윤진의 논리는 조선인은 건국 이전의 한국인이고, 조선족은 건국 이후의 중국인이라는 명백한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p. ~18)

  이제 구체적으로 윤동주의 국적 문제를 고려해 보자. 윤동주는 공식적으로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만주국은 1931년 만주사변 후 일본이 승리한 후 마지막 청조 황제 푸의를 앞세워 세운 일본 제국의 위성국이었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사라진 위성국, 괴뢰국인 것이다. 아마도 윤동주의 법적 호적은 만주국이세워진 후의 기록으로 보인다.

  1949년 건국 이전에는 장개석, 모택동의 국공내전, 국공합작, 항일 투쟁으로 중국이라는 국체가 모호한 상황이었다. 윤동주가 태어나 살던 연변지역도 공식적으로는 위성국인 만주국이었다. 만주국이 설립된 1932년 이전에는 중국 국적 없이 한국인 신분으로 중국 땅에 거주했던 거류인이었을 뿐이다.

  윤동주 집안은 1886년 증조부 윤재욱 대에 함북 종성에서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한 유이민이었다. 1900년 조부 윤하현(1875-1948, 73세) 때에 다시 명동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과 기독교 장로였던 윤하현이 개척한 교화촌, 교육촌이자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윤동주는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으나 국적은 한국인이었고, 1932년에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거주지 상 만주국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만주국 역시 국체國體가 인정되지 않는 비국가였으므로 윤동주는 계속 한국인 신분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은 1945년 2월이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1949년)되기 훨씬 이전에 사망했다. 1949년 건국 후의 중국 한인을 법적으로 '조선족'으로 규정했으므로 그는 조선족이 아니고, 결국 중국인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에서 진행한 윤동주 공정은 부당한 일이고, 시정돼야 할 일인 것이다. 이점에서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문인들의 책임도 크다. 조선족 문학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배려인지 모르지만 결국 윤동주를 중국 시인으로 만드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p. ~19)

  이와 관련하여 정부는 2022년 8.15 해방을 기념하여 무호적無戶籍 독립유공자 156명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도록 조치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하여 윤동주,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등이 포함된다. 이리하여 공식적으로 윤동주는 한국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 문인이라는 호칭은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중국은 윤동주를 조선족에 포함시켜 중국시인으로 삼는 정치공정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 (p. 20.)

  [ * 유이민: 타지로부터 흘러들어 온 사람(다음 검색). ※블로그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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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의식』 2022-가을(128)호 <기획연재_문학에세이 20>에서

  *  김영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박사. 계간『시와시학』평론상 · 계간『문학과의식』평론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