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조은설
저 푸르른 바닷속 삶도 들여다보면 녹록치 않아
세상 어디에서도 적용되는 생존의 법칙 앞에
멸치는 너무 작고 생은 짧아
그래, 뼈대를 키웠다 뼈대 있는 멸치가 되었다
물결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멸치의 꿈이 물이랑 사이사이 반짝이기 때문
어마어마한 멸치 떼의 군무 앞에
고래도 가끔 오금이 저린다
덩치가 크고 힘을 가졌어도
약한 것들이 뭉쳐 산을 이룬다면
우당탕
돌파의 문은 열리기 마련
팔뚝에 불끈 근육을 세운 어부가
촘촘한 그물로 바다를 낚을 때는
절대 물샐틈없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도
은빛의 빛나는 기억들을 굳히며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답게
멸치는 죽음조차 의연하고 단단하다
작은 몸으로 바다를 제압하던 멸치의 군무
고래를 떨게 하던 멸치들의 힘
사람들이 밥상 위의 멸치를 즐겨 먹는 것은
요즘은 좀처럼 찾기 어려운
뼈대 있는 지조가 그립기 때문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멸치는 바다의 먹이사슬에서 최하위에 속하기 때문에 천적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인 고래이다. 하지만 최하위 생명체인 멸치는 떼로 몰려다니며 유연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천적들에게 '오금'을 저리게도 한다. 멸치 떼의 '군무'는 집채만 한 고래도 아주 작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로 거대하다. 고래나 상어가 멸치 떼를 덮치면 춤을 추듯이 '돌파의 문'을 열어 비켜나간다. 시적 화자는 이런 멸치 떼의 군무를 보며 '약한 것들이 뭉쳐 산을 이룬다면' 고래에게도 '오금'을 저리게 만들 수 있다고 역설한다. 최하위 생명체인 멸치의 존재는 일반 민중들을 환기시킨다. 민중은 개개인으로 놓고 볼 때 힘없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멸치 떼처럼 한 덩어리로 뭉쳤을 땐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역사는 때때로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거대한 산'처럼 몰려다니며 살아가는 멸치에게도 피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지구상 최상위 포식자라 할 수 있는 인간이 만든 '촘촘한 그물'이다. 그 '그물'은 멸치에게 '돌파의 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팔뚝에 불끈 근육을 세운' 인간들이 '촘촘한 그물로 바다를 낚을 때는'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 이 시의 묘미는 죽음 이후에 있다. '펄 끓는 물속에서도' 멸치는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답게'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한다. (p. 28-29/ 론 115-116) (오봉옥/ 시인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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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천 개의 비번을 풀다』에서/ 2022. 10. 1. <미네르바> 펴냄
* 조은설/ 1995년『창조문학』 신인상, 1995년 ⟪한국일보⟫ 여성생활수기 당선, 2000년『월간문학』동화 당선, 2012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소리들이 사는 마을』『아직도 나는 흔들린다』『사랑한다는 말은』『거울 뉴런』등 4권, 장편동화『휘파람 부는 감나무』『밤에 크는 나무들』『토끼소년 베니의 지구별여행』『소곤소곤 숲 이야기』외 다수, 중편동화『솔뫼봉의 사슴계곡』『물차 운전수』『하늘개가 달을 삼킨 날』『파란 구슬의 비밀』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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