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통각(痛覺)/ 안도현

검지 정숙자 2022. 6. 18. 02:49

 

    통각痛覺

 

    안도현

 

 

  개복숭아나무는 행색이 초라해서 처마 아래 들지 못하였다

  못에 찔린 가지마다 꽃이 필 것이다 눈보라가 다녀가며 수차례 분홍의 안부를 물었던 부위다

 

  한천사寒天寺 철불은 손수 광배와 대좌를 치우고 앉아 있었다

  왼쪽 어깨를 감고 내리는 옷자락 만져보고 싶어서

  불경스러운 일에 마음이 끌려서

 

  꽃을 든 부처를 보고 나는 웃었다

 

  경전을 읽으면 눈알이 뽑혔고, 경전을 입에 올리면 혀가 뽑혔고, 경전을 손에 잡으면 손목이 잘렸고, 경전이 마르는 냄새를 맡으면 코가 잘렸다, 했지마는

  성스러운 기둥을 비천하게 어루만지는 눈보라

 

  나는 겨우 방아깨비의 더듬이를 당겨 지팡이로 쓰거나

  고양이의 수염을 뽑아 빗자루를 만들 수 없나 궁리했을 뿐

  그 빗자루로 내 발자국 지우지 않았다

 

  바짓단을 털었더니

  내가 걸어다닌 길들이 쏟아져 내린다

 

  유리창에 부딪혀 드러누운 눈송이의 날갯죽지 아래

  손끝이 시큰거리던 기억, 나는 따뜻하지 않은 뜨뜻한 종말을 만졌던 거다

 

  돌 주우러 골짜기에 들었을 때에도

  돌들이 이 세상 아픈 데를 꾹꾹 누르며 문지르고 있는 것

  나만 몰랐다, 한 뼘 남짓 평평한 돌을 들어 올릴 때마다

  돌 밑의 검은 흙이 울던 것을

 

  한 땀 한 땀 바늘자국을 내며

  기러기는 이불을 꿰매고 있는 거다

    -전문 (p.45-46)

 

 

   * 에스프리; 나의시_안도현>에서 한 구절/ "요즘은 의식의 간섭과 지배를 덜 받는 시를 쓰고 싶다."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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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문학과 사람이 선정한 한국 유수의 시인들, 詩와 에스프리

  『내   2022. 6. 10. 초판 1쇄 <문학과 사람> 발행

  * 안도현/ 1981년 ⟪대구매일신문⟫ &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바닷가 우체국』『간절하게 참 철없이』『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외, 동화, 산문집 등. 현) 단국대학교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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