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항아리/ 조창환

검지 정숙자 2022. 6. 17. 02:22

   

    항아리

 

    조창환

 

 

  오랫동안 나는 항아리에 담긴 것이 어둠인 줄로 알았다

 

  항아리에 귀 대고 들으면

  우웅 우웅 울리는 것이

  어둠이 내는 소리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둠은 깊고 따뜻하고

  부드러울 줄로 알았다

 

  가슴속에 항아리 하나 품고

  평생을 어루만지며 사는 사람이 되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일찍이 포기했던가

 

  깊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둠을 껴안기 위해

  나는 번쩍이는 도끼를 버렸다

 

  그런데, 이제,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니

  거기 담긴 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부서진 꽃, 흩어진 뼈, 몇 억 몇 천만 년의

  고독한 침묵

  그런 것들이 그르렁거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항아리를 차라리

  가슴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오늘부터

  내가 항아리가 되었다

 

  항아리가 된 나를

  어둠의 깊이와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사랑하는 누가 와서

  쓰다듬어 다오

  내가 눈물로 그르렁거릴 때

  그대는 우웅 우웅 운다고  말하며

  부드럽게 어루만져 다오

      -전문 (p.40-41)

 

 

   * 에스프리; 나의시_조창환>에서 한 구절/ "허무를 극복하는 유미주의자의 자세는 내 시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원동력이다." (p. 44)

   --------------

  * 특별기획/ 문학과 사람이 선정한 한국 유수의 시인들, 詩와 에스프리

  『내   2022. 6. 10. 초판 1쇄 <문학과 사람> 발행

  * 조창환/ 1973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나비와 은하』『저 눈빛, 헛것을 만난』『허공으로의 도약』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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