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호메로스/ 임보

검지 정숙자 2022. 5. 8. 18:14

 

    호메로스

 

    임보

 

 

  2104년 봄 어느 날 새벽

  대기권 밖에 설치된 천체 망원 렌즈에

  새로운 별이 하나 붙잡혔다

  사람들은 그 렌즈의 이름을 빌어

  그 별을 호메로스라고 명명했다

  그 뒤 호메로스는

  수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추적되었는데

  아홉 개의 긴 꼬리를 달고 은하계를 떠도는

  초록빛 낙지 모양의 아름다운 혜성이라고 했다

 

  2104년 여름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호메로스가 태양계의 외곽을 뚫고

  우리들의 세계로 끼어들었다고 보도했다

  지상의 모든 망원경들은 가슴을 조이면서

  초대받지 않은 태양계의 새 손님

  호메로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2104년 가을

  미국의 항공우주국은

  호메로스는 지구보다 70배쯤 큰

  초속 1000㎞의 놀라운 속도로

  태양계의 중심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고 있는

  녹색의 불덩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극히 기적적인 확률이긴 하지만

  태양계의 아홉 개 떠돌이별 중

  어느 것과 혹 충돌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2104년 11월 12일

  호메로스는 천왕성과 불과

  1천만㎞의 간격으로 스치며 지나갔다

 

  2104년 12월 6일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불덩이 호메로스를

  경악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문과 방승들은 종일 아우성을 치고

  끓어오르는 P. C.의 모니터들 앞에서 

  모든 일터의 일손들은 손을 멈추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는 정치가들도

  천만 군병을 거느린 장군들도

  억만금을 쥐고 있는 억만장자들도

  다 속수무책

  수만 개의 원자폭탄을 일시에 터뜨린다 해도

  호메로스의 진로를 1㎜도 바꿀 수 없다고

  한 천문학자가 침통하게 부르짖었다

 

  2104년 12월 7일

  브라질의 한 인디오 소녀는 그의 일기장에

  '지구는 밤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태양이 지고 나면 호메로스가 동편에 돋아

  태양처럼 지상을 다시 밝히고

  하늘의 별들을 삼켜버렸다

 

  2104년 12월 8일

  알라스카의 한 에스키모 노인은

  '우리들의 세상은 이제 무너졌다'고 중얼거렸다

  그들의 백야白夜 위엔

  불타는 호메로스가

  지지 않고 걸려 있었다

  빙산의 만년설은 무너져 내리고

  빙하의 굳은 얼음 바다는 금이 갔다

 

  2104년 12월 9일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엔 종일 폭우가 내려

  한 선교사의 뒤집힌 막사가

  모래의 강물에 떠내려갔다

  '주여, 이렇게 오시나이까'

  그는 홍수 속에 휩쓸려 묻히면서

  그렇게 울부짖었다

 

  2104년 12월 10일

  모든 전자기기의 바늘은 방향을 잃고

  모든 동력들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지구는 백열전구처럼 밝았지만

  전파와 전신이 끊어진 세상은

  암흑의 수렁이었다

 

  2104년 12월 11일

  뉴욕의 상공에 뜬 호메로스는

  드디어 온 하늘을 불태우면서

  번개처럼 세상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를 본 지상의 모든 온도계들은 자폭을 하고

  거대한 폭풍의 손이 지표의 모든 것들을 뽑아올려

  허공 속에 찢어 던졌다

  바다의 물결은 그를 향해 수백m나 솟아올랐고

  불타오르는 산야와 도시들 위에 다시

  산맥보다 높은 해일들이 몰려와 휩쓸고 지나갔다

 

  2104년 12월 12일

  호메로스가 겨우 8백만㎞의 간격으로 스치고 지나간 뒤

  끓어오르는 대기는 뜨거운 먹구름으로 지구를 덮었다

  빙하는 녹아 폐허의 대지를 삼키기 시작하고

  인간들이 빚은 지상의 모든 바벨탑들은

  깊은 어둠 속에 묻혔다

 

  2104년 12월 13일

  지구는 다시 기온이 내리면서

  새로운 빙하기

  천만 년의 깊은 잠 속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

 * 『월간문학』 2022-4월(638) <이 시대 창작의 산실/ 대표작 5편> 중에서

 * 임보(본명, 강홍기姜洪基)/ 1940년 전남 순천 출생, 곡성에서 성장, 1962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산상문답』등 26권, 시론서『시와 시인을 위하여』등 다수, 전) 충북대 교수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굉장한 삶/ 안희연  (0) 2022.05.09
홀/ 김준현  (0) 2022.05.09
울타리/ 임보  (0) 2022.05.08
찬양의 아침/ 이승하  (0) 2022.05.08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0) 2022.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