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송현지_기르는 마음(발췌)/ 당근밭 걷기 : 안희연

검지 정숙자 2024. 4. 17. 02:28

 

    당근밭 걷기

 

     안희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모두 나의 땅이라 했다. 이렇게 큰 땅은 가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있다.

 

  무엇을 심어볼까. 그게 뭐든 무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무언가 자라기 시작하고. 나는 기르는 사람이 된다. 

 

  주황은 난색暖色이에요. 약동과 활력을 주는 색. 그는 내가 머잖아 당근을 수확할 거라 했다. 나는 내가 바라온 것이 당근이었는지 생각하느라 잠시 휘청했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쏟아짐이라 믿었다.

 

  하지만 당근은 보고 있었네. 나의 눈빛. 번뜩이며 나를 가르고 간 것.

 

  나의 당근들, 흙을 파고 두더지를 들였다. 눈을 가졌다.

 

  자루를 나눠드릴게요. 원하는 만큼 담아가셔도 좋아요. 혼자 먹기 아까운 당근들,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떠나보낸 땅 위에서

 

  이제 내가 마주하는 것은

  두더지의 눈

 

  나는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당근밭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긴 이야기로서

    -전문, 『문학동네』 2023-겨울호

 

 

  ▶기르는 마음(발췌) _ 송현지/ 시인

  갑자기 "큰 땅"을 가지게 된 '나'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적어도 안희연의 주체에게는 이러한 현실이 어떤 책임감으로 다가온 듯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땅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그는 여기에 "무해한 것"을 심는 방식으로 이를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땅을 받음으로써 시작된 이 상황들처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심을지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당근"을 "기르는 사람"이 '된다'. (···) 자신이 선택하여길렀던 것이 아닌 당근을 모두 수확하여 주변에 나눠 주는 방식으로 이를 떠나보내고, 당근밭에 두더지를 들여놓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땅을 받거나 이를 당근밭으로 활용하게 된 상황은 어찌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는 자기의 통제 하에 무언가를 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거나 대적할 무언가가 있을 때 제대로 된 성장이 있다는 자신의 성장관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힌다. (p. 시 293-29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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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아돌하』 2024-봄(70) <시계간평> 에서

  * 안희연/ 2012년『창비』로 등단,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송현지/ 경북 대구 출생, 202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