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서평

거짓말을 통해 그려낸 진실의 화폭/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3. 1. 16. 21:43

 

 

  <서평>

  유안진 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시작,2008)

 

 

   거짓말을 통해 그려낸 진실의 화폭

 

       정숙자

 

 

   시는 생각을, 수필은 생활을, 소설은 삶을 매개한다. 그리고 생각은 생활을, 생활은 스타일을, 스타일의 집적은 저마다의 인성․인격․인생으로 굳어진다. 그러므로 딱히 문사가 아니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몸소 글을 쓰는 필진이며 독자이다. 어떤 장르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호 작용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시는 생각의 전형을 전파하므로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을 것이다. ‘문학의’라고 한정지을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 생각은 언행의 지시기관이기 때문에 브레인, 혹은 운명까지를 좌우하는 ‘생애의’ 본부가 아닌가.

   유안진 선생님(이하 존칭 생략)의 새 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라는 표제는 우선 두세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시 창작에 있어서의 방법론으로, 또 하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실상 그대로의 풍자로, 또 다른 하나는 전자의 두 항을 합친 개념으로도 짚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2음보로 이루어진 ‘거짓말:참말’이라는 대칭구도가 간결미를 엿보게 한다. 표제는 대개 그 한 권의 콘텐츠와 흐름을 내포하며 기의/기표의 거점이 무엇일까를 더듬어보게도 하니 말이다.

 

 

  풀잎 하나에도 가을이 내려와 주고

  비누방울에도 무지개가 걸려주는 이 땅에 태어나

  병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들 가는 중에 나도 끼여 있다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팔았고

  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열정은 수난의 맨발이었고

  그리움은 눈먼 황홀이었다

  여기를 보고 있어도 저기를 보는

  뜬눈보다 멀리 보는 눈먼 큰 눈을

  딱부리 사팔뜨기 사발눈이라고들 하지만

  눈 속에 출렁이는 바다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밤마다 외눈등대에는 불이 켜지고

  태풍이 불고 파도가 끓어 넘쳐 뒤집히기도 한다

  나의 왕국은 여기 아닌 끓는 바다건너 저기니까

  나의 시대는 훗날 언제이니까

  눈동자 너머의 저기로 가는 희망봉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

  물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뜨거운 내 눈물, 그 외길 밖에는.

                                                  -「눈 속의 바다 건너」전문

 

   이 시는 순간이나 사물의 일면을 포착한 게 아닌, 현재․과거․미래까지를 아우른 화자의 전 생애가 담긴 대형화폭이다. 20행의 길지 않은 문장 속에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적 고뇌, 차안을 넘어선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까지를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으로 그려냈다. 담박하지만 힘이 있고 은은하지만 깊이가 있으며 겸허하지만 색깔이 선명하다. 그리고 구슬프다. 한 생의 정한을 어떻게 이리도 단아하게 새길 수 있었을까. 불가에서는 우리의 삶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했으니 이 시는 개인적 회고이기보다 우리 모두의 보편적 궤적일 것이다.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팔았고/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이라는 문구를 접하며 어떤 묵객인들 마음 한구석 쩌렁한 공감을 뿌리칠 수 있으리오.

   이 시의 제목이「눈 속의 바다」이지만, 기실 밑지층(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천 개의 고원』142쪽/새물결)은 “눈동자 너머의 저기”를 향한 희망이다. ‘눈 속의 바다’란 얼마나 요원한 삼라만상인가. 여기서 의미하는 바다야말로 사파(裟婆)의 다른 표현일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뜻한다. 그 가없는 희로애락의 바다를 “뜨거운 내 눈물”로 압축시켰으며, “신대륙으로 가는 길” 또한 그 눈물을 통해서일 뿐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이다. 지난한 여정을 이토록 승화시킬 수 있었던 저력은 40여 년의 축적된 문랍(文臘)이 아닐까.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제작자는 항상 다수 속에서 제 나름의 목소리를 확보해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개성의 확보라고 말한다(김용직『韓國現代詩史 1』161쪽/한국문연).”

   개성은 유일무이한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자이며 예술가가 남길 수 있는 이미지의 근간이다. 새로움이라는 기치 아래 나날이 팽창하는 기교와 이즘(ism)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를 체득/견지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미증유의 지층을 창출하고 가꾸어나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작가적 피안에 닿았다고 봄직하다. “눈 속에 출렁이는 바다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표현된 바다 역시 모래톱에 넘실대는 물리적 차원의 바다가 아니라 관념의 바다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으리라. ‘사발눈’이라는 북한어까지를 수용한 「눈 속의 바다 건너」는 언어경제와 진정성, 은유의 다른 어휘인 ‘거짓말’의 문제에서도 모자람이나 넘침이 감지되지 않는다.

   이 시는 긴장과 탄력이 고루 배치되어 읽은 이에게 쾌감과 안도감을 안겨준다. 한행 한행 주해를 붙이고자한다면 이 한 편만으로도 원고 40매를 다 써야 되지 않을까. 하여 나머지는 독자 개개인이 직접 허블망원경을 통해 감상할 수 있게끔 우주 공간 어디쯤에 묻어 놓으려 한다. 창작물 안에서의 개성이란 ‘별나다’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내용은 물론이려니와 기법 면에서도 유행이나 구태를 뛰어넘는 번뜩임이 수반되어야 하리라. “나의 시대는 훗날”이라고 언명한 저자의 비전은 우리 모두에게도 목적지이고 희망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주관과 객관을 기능적으로 직조해낸 비단의 일종이다. 서정성의 유연한 안착에서도 틈새를 허용치 않아 잘 조여진 비거리를 제시했다.

   「눈 속의 바다 건너」를 넘기며 잠시 만년필을 눕힌다. 찰나를 딛고 가는 땅 위의 삶에서 슬픔은 풀보다 무성하고 구름보다 풍성하며 바람보다 은밀하다. 슬픔은 연월일시 남녀노소를 개의치 않으며 ‘동물이냐? 식물이냐? 광물이냐?’ 따지지도 않는다. 시공간의 모든 사물은 슬픔의 인질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생의 끝이-결구가 아름다운 시(詩)이기를 염원한다. 슬픔이 외출한 사이 기쁨을 맛보며 그 여운으로 굽이~굽이~ 노애락(怒哀樂)을 마시고 다음 차례의 기쁨을 산다. “숲에는 고요한 나무 없고, 내에는 멈춘 흐름 없네(곽경순의 시『세설신어上』347쪽/살림).” 이렇듯 세상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염열지옥이었으니 이슬언덕 나비에게 들려줄 시 한 편을 어찌 마음에 심지 않을 수 있으랴.

 

 

  시끄러워 잠이 깼다

  창유리에 달라붙은 반투명의 아우성

  떼 지어 엉키며 부풀리며 퍼져나가며

  쉴 새 없이 휘돌며 되울리는 메아리조차 자욱하다

  고요가 이렇게도 소리칠 수 있다니

  고요의 목청이 이렇게도 깊고도 요란할 수 있다니

  고요의 목소리가 내설악을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다니

  귀를 틀어막고 우왕좌왕하다보니

  먼데 산봉우리 하나가 모가지만 내 놓은 채 허우적거린다

  세상은 거대한 안개바다

  깊이 모를 대해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아우성만

  끼리끼리 휘돌며 메아리치고 되받아친다

 

  한나절을 기다려 나가보니

  산자락 산자락마다 선혈이 낭자했다

  단풍은 절정,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였다.

                                                                       -「고요의 아우성」전문

 

   고요는 아우성과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면서 바로 뒷면에 짝지워져 있다. 현실에서 그 심적 거리를 왕래한다는 것은 수월찮은 일이지만 시의 세계에서는 한순간에 오고간다. 아니, 한순간이 아니라 동시에 아우른다. “고요의 목소리가 내설악을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다니”-거짓말이 참말로 환치되는 광경이 절묘하다. 고요라는 무형태가 어찌 목소리와 식도를 가졌을까만 시인은 너끈히 “내설악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고 거짓말했다. “먼데 산봉우리 하나가 모가지만 내 놓은 채 허우적거린다”니 참으로 웅장한 상상력이 아닌가.

   시인은 새벽에 깨어 “반투명”으로 밝아오는 창을 대면했었나보다. 다시 잠들지 못한 채 근심에 싸였었나보다. 그 근심이 가져다주는 소란이 세상을 “거대한 안개바다”로 칠해 버렸나보다. 그런 가운데 한나절을 넘기고 문득 눈을 돌렸을 때 붉게 물든 단풍마저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로 읽혔나보다. 그리고 제1․2연 사이의 행간에는 오랜 세월이 내장되었다. 이 시에 담긴 한나절은 정작 하루의 절반이 아닐 뿐더러, “선혈이 낭자”한 가을도 일년에 한번 도래하는 계절이 아니라 인생의 가을이며 지은이의 사상과 관조가 깃들어 있다. “시의 폼을 결정하는 것도 사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이성혁『불꽃과 트임』136쪽/푸른사상사).”는 전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디오니소스적이기보다는 아폴론적인 침착함, 너울거리는 파도이기보다는 뿌리 깊은 섬, 꽃이기보다는 나무와 같은 푸근함이 『거짓말로 참말하기』의 진면목이리라. 거짓말이라는 부정적 언어를 참말 이상의 가치에 배열시킨 점만으로도 화자의 곧고 온유한 사상이 잘 느껴진다. 사기(詐欺)를 위한 술수가 아닌, 바름을 위한 거짓말! 그 거짓말은 진실을 지키고 주장할 수 있는 자의 의중에서만이 뿜어져 나오는 위트이며 지조인 것이다. “몸에도 몸의 마음이 있다(다니엘 데넷『마음의 진화』128쪽/(주)사이언스북스).”고 하니 시가 곧 시인의 심신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오는 이들은

  어디서 마주칠까

  외나무다리 건너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혀서일까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오는 이들 사이에

  나는 살고 있다

  마주칠까 겁나 오도가도 않고

  다만, 그저 그냥 살고 있다

  거짓말도 유전 된다

  문 닫고 들어오고 문 닫고 나가라고 이르시던

  어머니는 혹한 평생을 문 닫다가 가셨다

  나는 한술 더 뜬다

  문 잠그고 나가고 문 잠그고 들어오라고 꽥꽥거리며

  늘 문 잠그고 드나든다

  잠그어도 새나가는 울음 때문에

  울지 않으면 울려야 직성 풀리는 종치기가 있다기로

  죽은 소도 울려서 살려내는 고수(鼓手)가 있다기로

  천 년 전 빙하(氷河)를 살리려고 내가 먼저 운다

  나는 늘 거짓부렁 운다, 눈코 잠그고 운다

  우는 나를 따라서 빙하도 운다

  천 년 전이 녹느라고 천 년 후가 얼어붙는다

  살아가는 이들과 살아오는 이들 사이에서.

                                                                  -「거짓말」전문

 

   화자는 마치 개인적 슬픔이 아니라 인류의 가슴을 대신 울어주고 있는 것 같다. “거짓말도 유전 된다”고 했지만 실상은 ‘눈물’이 유전 되었다는 얘기다. “어머니는 한평생 문 닫다가 가셨”고 화자도 “늘 문 잠그고 드나드”는데, 그 까닭인즉 자꾸만 “새나가는 울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에 나타난 문은 아무리 단속해도 빗장이 풀리고야 마는 가슴속 눈물이다. “울지 않으면 울려야 직성 풀리는 종치기가 있다기로/ 죽은 소도 울려서 살려내는 고수(鼓手)가 있다기로/ 천 년 전 빙하(氷河)를 살리려고 내가 먼저 운다”고 했다. 그 지극한 진실을 “나는 늘 거짓부렁 운다, 눈코 잠그고 운다”고 진짜 거짓말을 하고야 만다. 다시 읽자면 “눈코 잠그고” 울기 때문에 남모르는 가슴 한구석에선 늘 눈물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정회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결코 동심을 잃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가장 먼저 말라버리는 게 눈물이건만 그토록 따뜻한 거짓말로=참말로 주위를 감싸고 안심시킨다. 그러한 성품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가계의 위의일 것이며, 타고난 기품일 거라고도 생각한다.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잃어버린 냉혹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신범순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209쪽/현암사).”지 않는가. 울고 싶어질 때야말로 본래의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선 게 아닐까.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처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을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구나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그림자도 반쪽이다」전문

 

    이 시는 끝 행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에 찍힌 물음표부터 해결해야 될 듯싶다. “아픈 쪽만 내 몸”, “아플 때만 내 마음”-그렇다면 아프지 않은 쪽이 해답이겠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으로 인해 잊어버린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쁨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세월을 인내하는 동안 “편두통이 생기더니 (……)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그렇지만 그 상심 끝에 금린옥척(錦鱗玉尺)을 건졌으니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예술작품은 절대적인 존재에 귀착된다. 존재하는 것, 즉 ‘이것은……이다’라는 말 자체를 현존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술작품의 임무이다(모리스 블랑쇼『문학의 공간』48쪽/책세상).”라고 논했음에랴.

   『거짓말로 참말하기』를 읽는 내내 유안진 선생님(여기서 존칭 부활)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눈 속의 바다 건너」「고요의 아우성」「거짓말」「그림자도 반쪽이다」뿐 아니라 「검정에 빠지다」와 「천고마을」 「파란 피」등. 다수의 시편들이 풍자이기보다는 서정시의 본령인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관념이었기에…. 문단의 대선배이며, 후배 시인들에게 따뜻한 그늘을 드리워주시는 선생님! 돌이켜보건대 선생님은 내 젊은 날의 동경이며 자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숫눈길에 발자국을 남겨주시는 어른이다.

   『거짓말로 참말하기』에 대한 서평 청탁이 왔을 때 감히 고사하지 못하고 받아들여 누가 되지나 않을는지 걱정된다. 선생님의 업적과 인품은 익히 알려진 터라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 여느 서평과 달리 한 편의 시(「눈 속의 바다 건너」)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데, 텍스트의 완결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여러 작품을 잠깐잠깐 접하느니보다 한 작품에 집중함으로써 전달력을 공고히 하려는 심산이었음을 밝힌다. 선생님의 다음 시집에서는 ‘나머지 반쪽’도 만날 수 있었으면, 하고 더 큰 기대와 기다림을 품는다. 깊은 감사와 함께 만년필 뚜껑을 더듬어 찾는 아침…, 마루에 깔린 창틀의 그림자가 유난히 정갈하다.

                                                                                                                                   

 

   *『애지』2009-봄호/ 이 계절의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