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_바흐의 시간
원구식
그날 이후 나는
느린 템포 속의 바흐를 편애했다.
아, 그 황홀한 순간.
눈을 감으면, 한없이 길게 늘어난
시간의 부드러운 손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허무여, 어찌하여
나는 네가 기쁜가?
오, 저 높은 하늘에서
내 동공 속으로
쏜살같이 내려오는 독수리 한 마리.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각도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소리가
경건하게 우당탕 쿵탕.
이제 잠든 풀잎을 깨울 시간이 되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눈을 뜨면 멀리, 여자인 듯한
피아노 연주자의 발뒤꿈치 소리.
허무여, 어찌하여
나는
네가 기쁜가?
눈을 뜨면 그 옆에, 사내인 듯한
첼리스트의 뭉뚝한 손가락.
시간의 인이 박인
첼로의 현을 간절하게 어루만지는.
일어나라
일어나라.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여,
운명이 네게 은밀하고도 친절하게 다가가길.
폭풍이
천둥이
번개가
너의 눈뜸을 방해하지 말길.
------------------
* 『현대시』 2022-1월(385)호 <신작특집> 에서
* 원구식/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지적 시점 / 배귀선 (0) | 2022.02.15 |
---|---|
데드마스크/ 송재학 (0) | 2022.02.15 |
영원/ 김언 (0) | 2022.02.14 |
성탄절/ 조원효 (0) | 2022.02.14 |
박대현_휴 에버렛과 시의 주체에 대한 단상(발췌)/ 반조(返照) : 정재학 (0) | 2022.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