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문종필_굶주린 약속의 말(발췌)/ 봄눈 : 신동옥

검지 정숙자 2021. 7. 28. 02:12

 

    봄눈

 

    신동옥

 

 

  나는 작은 눈송이를 꿈꾸었다 구름 속에서 파도가 치던 밤 나는 내리는 눈송이로 다시 태어났다 서귀포 섶섬 너울 아래 엎드린 바다거북이 등짝에 올라타고

 

  다도해 섬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고흥반도에 상륙했다 거기서부터 팔영산 자락을 돌아 걸어서 집으로 갔다 내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나보다 먼저 고향 집 지붕에 닿아 녹아내리도록

 

  대한 경칩 다 지난 즈음 동백도 지고 문드러진 봄눈이 되어 되도록 천천히 나도 모를 꿈결에 영영 버려진 고아처럼 지친 발걸음으로 고향 집 대문을 두드려보다가

 

  하늘이 운명을 결정한다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 이 땅 위에 하늘을 내려야 한다시던 토정 이지함 선생 수염이 젖어가는 만세력 겉장 위에서 까무룩 반짝이다가

 

  우글거리며 몰려오고 몰려가는 봄빛에 몸을 숨겼다 나는 살아 있었고 나주 작은 눈송이였다 아지랑이 춤추는 봄날 마당귀 잠든 강아지 눈썹에 내려앉았다가

    -전문-

 

   굶주린 약속의 말(발췌)_문종필/ 시인

   "나는 작은 눈송이를 꿈꾸었다"로 시작하고 있는 이 작품은 화자의 꿈이 더 이상 꿈이 아님을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꿈은 꿈속에서 현실이 된다. 화자는 봄빛에 몸을" 숨기며 몸을 사리지만 거뜬히 바다거북이 등짝에 올라타고 고흥반도에 상륙했다가 팔영산 자락을 돌고 돌아 고향집 지붕과 대문에 내려앉는다. 이지함 선생 수염이 젖어가는 만세력萬歲曆겉장에서 반짝거린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자신도 위태로운 봄눈이 되어 닿고 싶은 지난 추억에 손길을 뻗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여정이 가능한 것은 "내 마당이 더 따뜻해 보인다."라는 문장을 스스로 획득했기 때문이다. (p. 시 66/ 론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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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문예』 2021-봄(92)호 <신작 소시집/ 해설>에서

  * 신동옥/ 2001년『시와반시』로 등단, 시집『밤이 계속될 거야』, 시론집『기억해 봐, 마지막으로 시인이었던 것이 언제였는지』외 다수

  * 문종필/ 2017년 『시작』 문학평론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