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너와 눈사람과 나/ 김중일

검지 정숙자 2021. 6. 18. 01:48

 

    너와 눈사람과 나

 

    김중일

 

 

  출근길 아파트 현관 앞에 서 있던 눈사람이 퇴근길에 사라졌다.

  저세상에 또 한 사람이 죽었구나.

  저세상에 아직 죽을 사람이 남아 있구나.

  이 세상에 이제 눈사람은 꽤 귀해졌으니, 저세상에 죽을 사람도 귀해졌겠구나.

 

  지구의 온난화와 눈사람과 사람의 개체 수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치 하나로 엮인 얼음 매듭처럼

  우레로 내려쳐도 부술 수 없지만

  어느 한 줄기라도 느슨해지면 맥없이 풀리고 만다.

 

  내 첫 생일날 저세상에 누군가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차갑게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만들어 놓은 눈사람은, 나를 대신해 저세상에 존재하는 눈사람은

  이 순간에도 고독하게 서서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

  눈사람은 아무리 정성껏 만들어져도 문밖에 고아처럼 버려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젯빛 하늘을 쳐다보면 생일날 문밖으로 내쫓긴 기분이다.

  그리고 나의 눈사람을 만들어준 천진한 누군가는

  이 세상에서 나를 낳아준 부모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나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누군가다.

 

  나의 눈사람이 서 있는 그 자리에 햇볕만이 온종일 흰 먼지처럼 흩날리고, 저세상 누군가는 이 세상의 한나절을 일생으로 살듯

  대개의 경우 저세상의 그 한나절 정도를 살고 나는 죽는 것이다.

  시간이 지독히 느리게 흐르는 내 입장에서는 충분한 인생이다.

  그래놓고 이 세상을 뜨는 순간 나는 그러겠지.

  일생이란 마치 한나절 같구나.

  죽는 순간에야 얻게 되는 일생 가장 사실적인 깨달음이다.

 

  상념에 잠겨 무심코 그만 눈 무더기를 밟으니 우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빨갛게 언 볼을 한 너는 현관 앞에 서서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다.

  네가 저세상에 곧 이주할 누군가를 생각하며 애써 만들었을 작은 눈사람이 나 때문에 그만 다친 채 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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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사』 2021-봄(105)호 <시사사 포커스 1/ 신작시> 에서

  * 김중일/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국경꽃집』『가슴에서 사슴까지』『유령시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