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의 갠지스, 천수만/ 하재일

검지 정숙자 2021. 4. 29. 02:06

 

    나의 갠지스, 천수만

 

    하재일

 

 

  겨울 철새의 새오름이 하늘로 솟구치는 천수만 상펄은

  조금 사리가 뒤바뀌는, 달이 태어난 바다의 배꼽이다.

  라텍스 피부를 가진 바닷물이 양수처럼 가득 차오르는

 

  천수만은 원래 초승달에 생일로 태어났지만

  천 개의 연꽃잎을 어둠에 감추고 매일 밤 한 장씩만 떼어서

  유백색 둥근 얼굴로 바다의 장지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장대 키를 훌쩍 넘긴 달빛이 머리를 산발하고 옆구리에 물 항아리를 둘러맸다

  항아리에서 연신 국자로 물을 퍼 수량을 조절하며 부드러운 입김으로

  바람을 불러 체에 모래를 곱게 거른다

 

  비옥한 여신의 보름사리

  주름 잡힌 달의 옆구리에 밀물 들면

  바다는 살과 살이 맞닿은 강줄기의 안주머니 깊숙이 가죽 지갑 속에

  외씨를 심듯 패류貝類의 꿈을 꼭꼭 숨겨 둔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은밀한 밤에 섬들이 토한

  잠 덜 깬 모시조개의 탯줄을 받아 내며

 

  밤마다 천수만에 뜨는 바르한의 초승달은

  별과 바람과 노을을 통해 모든 생명을 제각각 길러 낸다.

  그중 세 번째 통로인 상현달은 하늘의 미간에 위치해 있기에

  생각이 너무 무거워 차라리 눈을 감고  있다가,

  결국 밝은 해를 보지 못하고 섬이 만든 캄캄한 그리움 속에서

  바다의 음성을 겨우 매만지다 어둠의 동공에 투신했다

 

  두 갈래의 길로 빛이 새어 나와 다시 불꽃을 만들어 낸다

  놋쇠로 만든 폭풍의 삼지창을 미풍에 삭힌 다음 남게 되는

  그날그날의 불 꺼진 재는 바다의 지붕 위에 낙조로 흩뿌려져

  주꾸미와 새조개를 기른 양막에 오래 유등으로 흘러 부활한다

  철새 울음이 쌍발 썰매를 끌고 온 겨울,

  찾아온 새들이 하늘이 내준 빈 관절 하나를 입에 물 때

  석화는 혹한을 털모자로 짜 머리에 쓰고 살을 채운다.

  이때 바다에 가득 찬 달빛은

  눈발이 날아와 앉았던 느린 염기를 활활 태워

  우둔한 결빙을 온몸으로 버티며 건너가고

 

  햇살이 내려앉은 대낮엔 집게발을 높이 쳐든 황발이가

  앞마당 갯벌 가득 떼를 이루어 양귀비 꽃밭을 일군다.

  붉은 만다라를 게들이 연신 비눗방울처럼 퐁퐁 게워 내며

  경건하게 강심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순간,

  붉은 구름은 반들반들한 썰물을 하루 종일 멍석처럼 말고 갔다

  다시 가볍게 밖으로 펼치고 나온다

 

  천수만에 낮과 밤을 지피는 파도의 키에 맞춰

  무려 삼억 삼천의 달빛이 퍼뜨린 물고기들이 이웃하며 산다.

  밤마다 그들은 마른 나문재 가지로 어둠을 먹물로 찍어

  풍요를 비는 색색의 타르초를 상형문자로 새긴 다음,

  해 질 녘 가창오리 떼의 길게 목 뺀 울움소리에 

  마지막 햇살을 얹어 광목천으로 펼치는 것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천수만'에는 "삼억 삼천의 달빛이 퍼뜨린 물고기들"로 이루어진 생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승 세계의 '만다라'다. 그리고 이 물고기들이 바로 '경전'의 '문자'를 써서 '타르초'에 새긴다. 오색 천에 티베트 불교 경전을 새긴 바람의 깃발, '타르초'(타르초는 망자들을 추모하는 깃발이기도 하다. 타르초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된다.). '천수만'의 물고기들은 "어둠을 먹물로 찍어" '상형문자(자신의 몸 자체로 쓰는)'로 '타르초'를 새기고는, "해 질 녘"이 되면 "가창오리 떼의 길게 목 뺀 울음소리"와, "마지막 햇살을 얹어 광목천으로" 그 '타르초'를 펼쳐 낸다. 이 '울음소리'와 '마지막 햇살'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그리는 것일 터, 이 경계선을 펼쳐 내는 '타르초-경전-천수만'은 자연 자체가 아름답게 '경전'을 써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그 황홀한 '경전'은 한편으로 어둠이 내장되어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죽음의 고통과 섬의 고독이 빚어낸 어둠, 이 '경전'을 발견하여 우리의 말로 번역하면서 써지는 시인의 시편들에는, 그러므로 고독과 고통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그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다. (p. 시 88-91/ 론 143-144) (이성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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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달마의 눈꺼풀에서, 2020. 10. 24. <파란> 펴냄

  * 하재일/ 충남 보령 출생, 1984『불교사상』으로 등단, 시집『아름다운 그늘』『타타르의 칼』『동네 한 바퀴』등, 청소년시집『처음엔 삐딱하게』(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