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피항(避航)/ 배세복

검지 정숙자 2021. 4. 25. 02:52

 

    피항避航

 

    배세복

 

 

  돛으로 몰려드는 바람이 심상치 않아요 이제 항로를 벗어날 시간이에요 일 년 전 태풍의 시절처럼 말이죠 길어야 사나흘 정도의 피항이라 생각했죠 허나 밤바다에서 바라보는 별이 한없이 새끼를 치는 것처럼 빔은 또 밤을 낳았죠 어느 밤은 앞 배가 빠져나가지 않아 어떤 밤은 뒷닻이 풀어지지 않아 또 무수한 어느 밤 동안은 천지사방이 여울목 귀신처럼 울어대서요 어찌 당신 품을 떠날 수 있겠어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해 붉어진 눈으로 물을 울려다보면 아무 말 말고 하루 더 쉬어 가라고 돛대를 입술에 갖다 대던 당신이었지요 아 모항母港, 모항모항 입 안에서 마구 맴돌았지요 올해는 정말로 며칠만 머물겠습니다 까치놀 사라지기 전에 어둠 깊어지기 전에 피항항避航港 당신 품으로 가겠어요 그런데 아까부터 선장은 소리 질러요 거긴 벌써 몇 해 전에 폐항돼 버렸어

    -전문-

 

 

  해설> 한 문장: 뱃길에 있는 위험물이나 장애물 또는 태풍, 풍랑, 지진, 해일 따위의 자연재해를 피해 운행함을 뜻하는 '피항避航'을 빌려 시인은 자신이 겪어온 생의 여러 아픈 기억들을 성숙하게 조련하고 더 나은 항진航進을 위해 자아를 성찰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개인의 지혜는 성숙될수록, 기운은 중화될수록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형성하는 타인의 생도 더불어 아름다워진다. 말과 의식이 확장되고 기가 중화된 순수한 영혼의 자기 고백서로써 자아의 집착을 버리고 진아進我를 추구하는 선인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밤은 또 밤을 낳았죠 어느 밤은 앞 배가 빠져나가지 않아 어떤 밤은 뒷닻이 풀어지지 않아 또 무수한 어느 밤 동안은 천지사방이 여울목 귀신처럼 울어대서요 어찌 당신 품을 떠날 수 있겠어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해 붉어진 눈으로 물을 올려다보면 아무 말 말고 하루 더 쉬어 가라고 돛대를 입술에 갖다 대던 당신이었지요. 아 모항母港"에서 시인이 갈구하는 모항母港"은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겠다는 깨달음 혹은 다짐으로 읽힌다.

  '지나간 것은 지나갈 대로 그런 의미'가 있듯 이미 '폐항'이 되어버린 기억들은 모항母港"으로의 회귀, 즉 진인眞人으로서의 깨달음이 있는 한, 더 이상 나의 처소는 아닐 것이다. (p. 시 71/ 론 100) (이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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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목화밭 목화밭에서, 2021. 4. 30. <달아실> 펴냄

  * 배세복/ 충남 홍성 출생, 2014⟪광주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몬드리안의 담요』, 볼륨(Volume)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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