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철조망에 구멍을 뚫고 외 1편/ 김예태

검지 정숙자 2021. 4. 24. 02:16

 

    철조망에 구멍을 뚫고 외 1편

 

    김예태

 

 

  소녀는 철조망에 구멍을 뚫고 바다로 도망쳤습니다

  먼 바다로부터 하얀 갈기를 휘날리며 말들이 달려옵니다

  물보라를 일으키는 말 말 말 섬과 구름 갈매기와 모래바람 땅강아지들이 덩달아 물보라를 일으키며 소녀 속으로 들어옵니다

  소녀는 말을 타고 다니며 갯까치수염을 잡아당기고 나문재 묽은 머리카락을 뽑아봅니다 갯지렁이를 잡아먹고 조개도 먹었습니다

  해가 설핏해져서 돌아오자 할머니가 말합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혀?"

 

  다음날도 소녀는 개구멍을 빠져나가 산으로 갔습니다

  단풍잎새 하나를 떼어내 구멍을 들여다봅니다 단풍나무 속에서 훅훅 불꽃이 입니다 불꽃은 첩첩산중의 나무와 바위 능선 산비둘기까지 모두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소녀는 몸이 뜨거워 산골 물에 들어앉아 노래 부르며 바람과 함께 춤을 춥니다

  소녀를 흔드는 할머니 얼굴에 근심이 깊어집니다

  "아픈 겨? 약이라도 쓰야겄다"

 

  소녀가 나다니는 길이 반질반질합니다 개구멍이 점점 커졌습니다

  해님의 침상 아래서 낮잠을 자고 양털구름 이불 한 채 얻어 돌아오는 길에 울고 있는 할머니를 만납니다

  할머니는 소녀를 철조망 안으로 끌고 가서 거울 앞에 세웁니다 할머니보다 더 굽어진 등 하얗게 센 머리 패인 주름 꺼진 눈···

  어느새 할머니가 살아온 날보다 소녀가 산 날이 훌쩍 많아졌습니다

      -전문-

 

    --------------

    상대성원리

 

 

  처음에 그는 우리 곁에 없었다

  우리가 출발선에 서서 신호총을 기다릴 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주먹 그러쥐고 동이 트도록 달리고서야 어슬렁어슬렁 뒤를 쫓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어깨를 맞대어 동무하고 싶었지만 어린아이 잰 몸짓으로 느짓한 그의 걸음을 기다릴 수가 없다

  삼단 같은 머리칼에 푸른 물이 돌 때에도 서로의 걸음은 보폭이 맞지 않아 우리는 무시로 그를 기다려야 했다

  겨울을 건너는 길목은 늘 소망과 낙망의 일교차가 심해서 수은주만 터질듯이 솟아오르고 얼어붙은 하늘로는 길이 나지 않았다 곤고한 다리 쉬어가자, 쉬어가자 한두 번 겨울잠을 청했는데 함께 누운 줄 알았던 그가 밤새도록 눈길을 걸어 우리를 따돌렸다

  진득한 친구

  우리의 유전자마저 소멸한다 해도 제 홀로 걷고 있을 저 견고한 다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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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빈집 구경』에서, 2014. 1. 27. <파루> 펴냄

  * 김예태/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 초등논리 논술 교재『같은 시작 다른 끝』외 24권, 수필집『문을 연 아가씨와 문을 닫은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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