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1926-1956, 30세)
지금 그 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전문-
▣ 시의 사후성, 사랑의 사후성/ 박인환 시의 타자성 연구(발췌) _ 조혜진/ 한세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의 창작 배경을 살펴보면 6 · 25 전란으로 폐허가 된 1956년 이른 봄, 지금은 국민배우가 된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선술집 <은성>에서 가수 나애심이 마땅한 노래가 없어 노래를 거절하자, 박인환이 즉석에서 써내려간 시로 동석했던 극작가 이진섭에 의해 작곡, 술자리에 뒤이어 합류하게 된 테너 임만섭에 의해 불리게 된 노래로 당시 제목 대신 '명동 엘레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김태완「문인의 遺産, 가족이야기4. 시인 박인환의 장남 박세형」, 『월간조선』2015, 2015. 4. 참조).
그런데 이때 창작 시점에서 노래로 불리워진 시라는 점에서 시 「세월이 가면」은 창작 배경부터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시 창작 후, 작곡가에 의해 음악으로 작곡되어 가창자인 대중들에게 널리 노래로 불리워지기 전까지 시→음악→노래의 과정을 거친다고 할 때, 이 시는 이러한 단계적 변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노래가 된 시, 시의 사후성으로서 노래의 타자성을 통해 시/음악/노래의 위계질서를 부정한다.
나아가 이때 시의 사후성으로서 노래의 타자성은 시/노래의 이분법을 초월할 뿐 아니라 창작자/가창자, 창작 주체/ 향유 주체의 이분법을 초월, 시와 노래의 이분법적 위계질서를 해체함으로써 말/글의 이분법을 해체, 문자로 창작된 시라는 시의 문자적 기원을 넘어 노래로 창작된 시로서 의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리릭(lyric)이 현악기의 음악에서 기원한 서정시의 기원이라 할 때, 이러한 태도는 음악/시를 구분 짓는 진화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시선을 해체, 창작 시점부터 노래로 창작된 시라는 시의 사후성을 통해 서구 문예이론에서 말하는 시의 기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P. 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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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현실』 2020-겨울(82)호 <특별기획/ 박인환 시 연구>에서
* 조혜진/ 1994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필명 조하혜_여름별), 시집 『도넛, 비어 있으므로 존재한다』 『울지 말아요, 비둘기』, 역서 『어른을 위한 동화-오스카와일드의 환상동화집 : 행복한 왕자』, 공저 『생활세계와 인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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