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바위에 새겨진 송시열의 시
조해훈/ 시인, 고전평론가
전남 완도국제항으로부터 12㎞ 되는 거리에 보길도, 이 섬 선백도 마을 앞 산 기슭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각자암刻字岩인 '글씐바위'라 불리는 바위(전남 완도군 보길면 중통리 산 1-1번지)가 있다. 비바람에 마모돼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글씐바위는 역사적으로 아픈 사연을 갖고 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한 번 이야기를 따라 들어가 보자.
조선의 제19대 왕인 숙중(재위 1674-1720, 46세)은 궁인인 장옥정(희빈 장씨 1659-1701, 42세)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서둘러 원자(후일 경종)를 책봉하게 된다. 서인(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1607-1689, 82세)이 이에 반대하자 제주도 유배 명을 받았다. 송시열은 이조판서와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겸 학자로 당대 최고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가 유배길에 올랐는데 풍랑이 심해 잠시 머물 곳을 찾았다. 파도가 진정되기를 바라며 머문 곳이 보길도의 선백도 마을 바닷가였다.
그러면 원자 책봉 문제가 어떤 것이기에 송시열이 유배를 가게 된 것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서인西人이었던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1667-1701, 34세)가 만 14살의 나이로 숙종의 두 번째 정부인이 되었다. 숙종은 자연히 서인 정권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궁녀인 장옥정이 숙종의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그러자 상황이 급변했다. 숙종은 9년간 계속된 서인정권에 염증을 느끼던 차에 남인南人의 후원을 받던 장 씨가 귀한 왕자를 생산했으니 서인을 밀어낼 구실이 생긴 것이었다.
기사년인 1689년(숙종 15년) 새해 벽두부터 숙종은 갓 태어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혈안이 됐다. 송시열 등은 "정비(인현왕후)의 춘추가 아직 젊으니 더 기다려서 적자를 계승자로 삼아야 한다"고 반대했다. 숙종은 이때 정권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전격 교체한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기사년에 일어난 환국이라고 하여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부른다. 즉 남인이 원자 책봉 문제로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을 일컫는다.
숙종은 세 차례나 신하들의 권력을 바꿨다. 요약하자면 1680년 경신환국(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 1689년(희빈 장씨와 중전 책봉과 남인정권 재등장), 1694년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와 서인 정권 재등장) 등이 그것이다. 숙종의 이러한 권력 재편을 두고 혹자들은 친위쿠데타 또는 노련한 정치전략이라고 평한다. 숙종(재위 1674-1720, 46년)은 52년간 재위한 영조(1724-1776, 52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긴 만 46년간 조선을 다스린 군주다.
기사환국을 다시 한 번 더 정리를 해보자.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 씨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했다. 그러자 숙종은 민 씨가 왕후로 간택되기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궁녀 장옥정을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던 차에 장 씨가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일약 정치적 격변을 몰고 오게 되었다. 왕자 윤의 출생으로 파급된 여파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치 실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 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했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 씨가 아직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 책봉을 반대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그 권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루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이때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다 끝난 일에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회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 보내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다시 글씐바위 이야기로 돌아가자. 송시열이 보길도에 머문 계절은 추운 겨울이었다. 바닷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당시 원자 책봉 문제에서 서인이 남인에게 밀렸던 것이다. 송시열은 당연히 임금에 대한 서운함이 클 수밖에 없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랐기에 임금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송시열은 자신의 심경을 나타내는 시를 한 수 읊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 해변의 아름다운 암벽에 그 시를 새겼다. 공교롭게도 보길도는 남인이었던 고산 윤선도(1587-1671, 84세)의 땅이었다. 윤선도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던 것이다. 윤선도가 그렇게 보길도에 머문 세월이 10여 년이었다.
즉 송시열은 그와 정치적 숙원이었던 윤선도가 머물렀던 보길도에 자신도 머물게 된 것이다. 또한 윤선도는 1659년에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놓고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하여 1660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글씐바위에 송시열이 새긴 시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보자.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여든셋 늙은 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있구나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쫓겨난 신세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대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밖에
貂裘舊恩在(초구구은재)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위 시를 보면 당시 송시열은 여든셋의 고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행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숙종이 원자 책봉을 너무 빨리 한다고 소를 올린 게 무슨 큰 죄가 되었을까'라며 반문하는 내용이다. 숙종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권력을 바꾼 것이다. 4행의 '세 번이나 쫓겨난 신세'라는 뜻은 그가 세 차례나 유배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송시열은 파직, 삭출되었다. 이듬해(숙종 1) 정월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경북 포항의 장기 · 경남 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여기에 1689년 1월 원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 유배 명을 받은 사실을 말한다. 송시열은 재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뜬 것이다.
조선시대 어느 왕조나 선비들이 화를 입는 경우가 있었지만 연산군과 중종, 숙종 때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였다.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두 논객이었던 윤선도와 송시열, 남인과 서인의 영수가 이 남도의 먼 끝 보길도에서 만난 것이다. 이 바위에는 그 후인 18세기에 임관주(1731-1785, 54세)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다 보길도에 머물며 1767년 음력 7월에 읊어 글씐바위에 새긴 시도 남아있다.
----------------
* 『사이펀』 2020-가을호 <조해훈 시인의 한시로 읽는 역사 이야기 ③> 에서
* 조해훈/ 시인, 고전평론가
'고전시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과객운(次過客韻)/ 이매창 (0) | 2020.12.14 |
---|---|
만청(晩晴)/ 김문호 (0) | 2020.12.05 |
김덕근_괴강에서 보내는...(발췌)/ 강어귀의 장삿배 : 김득신 (0) | 2020.11.08 |
정재민_바둑 장기 투전 골패...시가들(발췌)/ 퇴공무일사 : 이규보 (0) | 2020.10.16 |
속절없이(謾吟)/ 김호연재 (0) | 2020.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