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나
김억(1895, 고종 32~ 미상)
밤이 왔다. 언제든지 같은 어두운 밤이, 遠方으로 왔다. 멀리 끝없는 은가루인 듯 흰눈은 넓은 빈들에 널리었다. 아침볕의 밝은 빛을 맞으려고 기다리는 듯한 나무며, 수풀은 공포와 암흑에 싸이었다. 사람들은 미소하고 약한 불과 함께 밤의 적막과 싸우기 마지아니한다. 그러나 차차, 오는 애수, 고독은 가까워 온다. 죽은듯한 몽롱한 달은 薄暗의 빛을 稀하게도 남기었으며 무겁고도 가벼운 바람은 한없는 키스를 따 우며 모든 것에게, 한다. 공중으로 나아가는 낡은 오랜 님의 소리 「현실이냐? 현몽이냐? 의미 있는 생이냐? 없는 생이냐?」
사방은 다만 침묵하다.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영구의 침묵! 밤의 비애와 및 밤의 운명! 죽음의 공포와 생의 공포, 아! 아이들은 어두운 밤이란 곳으로 여행온다. 「살기워지는 대로 살까? 또는 더 살까?」하는 오랜 님의 소리, 빠르게 지나간다.
고요의 소리, 무덤에서, 내 가슴에, 침묵.
-전문, 『학지광』 5호, 1915. 5.
▶산문시의 시적 전략과 미학(발췌)_김진희/ 문학평론가
김억은 1915년 '산문시' 창작을 내걸고 「밤과 나」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산문시를 의식하고 창작한 첫 번째 작품이었지만 구성과 표현에서 높은 시적 성취를 거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밤과 나」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연은 밤이라는 시간의 어둠과 암흑이 빈들, 땅, 공중 등의 공간을 채우고 있음이 묘사된다. 두 번째 연은 이 시공간을 메우는 침묵이 이야기되고, 세 번째 연에서는 앞의 두 연에서 진술되었던 어둠, 침묵, 죽음, 공포 등이 '내 가슴'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산문시 안에서 각 단락이 내용상 심화되고, 진전되는 율동적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김억은 밤과 어둠이 시적 자아의 내 · 외부 공간에 스며드는 과정, 즉 밤이라는 시간의 공간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비애와 고독, 공포와 불안이라는 시적 정조와 무드를 강조하기 위해 한 행, 한 행이 분절된 시형보다는 통합적인 산문시의 형태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다'로 끝나는 문장의 종결어미 역시 어둠에 잠긴 '고요의 소리', 침묵에 갇힌 산문시의 시형 안에서 울리는 시적 자아의 낮은 읊조림을 상상하게 한다. 김억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번역하면서, '만년의 근심과 아직 쓰러지지 않는 청춘의 생각'이라는 애상적 정서에 주목했는데, 위의 작품에서도 역시 밤과 어둠을 통해 삶의 불안과 애상이라는 정서를 산문시라는 형식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p. 시 51-53/ 론 51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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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학』 2020-가을호 <기획특집_오늘, 그리고 미래의 산문시> 에서
* 김진희/ 1996년 《세계일보》로 등단, 저서 『시에 관한 각서』 『불우한 불후의 노래』 『기억의 수사학』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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