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발자국
구재기
곰솔밭과 바다 사이
백사장에서 흩어진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
이른바 참선參禪 같은 것
전혀 중단이 없는 물결이
그냥 밀려왔다가 밀려가고 있는
이 지상의 한켠
어디에서 이야기의 말머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는
바다는 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할 듯
자꾸만 몸을 흔들어댄다
누구든 마음에 중요하게 여겨
생각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
망상은 죽 끓듯 끓고 있는데
어떻게 말머리를 안다 할 수 있는지
고개를 숙이는데
아, 물결이 지난 자리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물 발자국, 이것은 분명 업業이다
지워지지 않는 말머리의 생명이다
설명하지 않는데 있는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스스로 눈을 떠서 실제 보게 해주는
영생營生의 물 발자국을 본다
-전문-
▶자연의 노래, 화엄의 노래_구재기 시인의 신작시(발췌)_ 김현정/ 문학평론가
구재기 시인의 최근 시에서 보이는 화엄의 세계는 시 「물 발자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끊임없이 "죽 끓듯 끓고 있"는 망상에 사로잡힌 시인은 모든 것을 끌어안고, 세상의 향기를 품고 있는 바다로 향한다. 망상을 잠재우고 싶은 욕망을 담은 채 말이다. "곰솔밭과 바다 사이/ 백사장에서 흩어진 마음"을 찾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나 시인은 "전혀 중단이 없는 물결이/ 그냥 말려왔다가 밀려가고", 바람에 날려가기라도 할 듯/ 자꾸만 몸을 흔들어" 대는 바다를 보며 쉬이 망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시인은 "물결이 지난 자리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물 발자국"을 발견한다. "지워지지 않는 말머리의 생명"을 본 것이다. "설명하지 않는데 있는/ 또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영생營生의 물 발자국"을 보며 화엄의 경지에 있는 바다의 이면을 엿본다. 그리하여 그는 파도 속에서, 밀물과 썰물 속에서도 "참선參禪"하는,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물 발자국'을 내는 바다에 경의를 표한다. 바다를 통해 화엄의 세계를 보고, 인생의 길을 터득한 것이다. (p. 시 191-192/ 론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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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2020-여름호 <시 깊이 들여다보기/ 신작시/ 작품론>에서
* 구재기/ 충남 서천 출생,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살아갈 이유에 대하여』 『모시 올 사이로 바람이』 등
* 김현정/ 충남 금산 출생, 1999년 『작가마당』으로 등단, 저서 『백철문학 연구』 『대전 충남의 향기를 찾아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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