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내 신발 속의 여자/ 이순현

검지 정숙자 2020. 3. 1. 20:59



    내 신발 속의 여자


    이순현



  그녀가 떠났습니다


  캐리어를 반려처럼 옆자리에 앉히고

  어느 이른 새벽 가버렸습니다

  자동차 꽁무니의 빨간 등이 둘이다가 넷이다가

  송이송이 부풀다 번지다 주르르 쏟아졌습니다


  의심과 질투, 그녀의 친척들도

  저장할 수 없는 느낌들도 한꺼번에 사라졌습니다


  새끼를 낳는 해마 수컷처럼

  나는 그녀를 낳습니다


  그녀1, 그녀2, 그녀3…… 불어나는 그녀는

  붐비며 넘쳐나며 핏줄을 돌고 돌다

  안경 밑으로 흘러내리거나

  음경 끝으로 분출되거나


  너무 많은 백혈구가 생명까지 갉아 먹듯

  골수가 헐고

  내 심장이 부어올라

  못 쓰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녀에 좀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갔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어난 그녀로

  공기 한 가닥 드나들 수 없을 때

  염낭거미처럼 뿔뿔이

  나를 박차고 날아가겠지요


  비로소 떠남이 완성되겠지요

  안쪽을 파 먹혀 찬란한 나는

  가장 그녀다워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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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사람』 2020-봄호 <Zoom in/ 대표시> 에서

  * 이순현/ 1960년 경북 포항 출생, 1996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내 몸이 유적이다』외, 논문『오규원의 '시론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