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션』2019-봄호, 무기명으로 '발표/읽기'되었던 시 5편은
『포지션』2019-여름호에 수피아 시인의 작품이었음이 공개됨>
조용한 창문 외 4편
수피아
내 앞에는 네모난 참에 네모난 하늘이 있다.
비린 냄새에 식욕을 느끼며
소파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
그녀가 내 등을 쓸어 넘긴다.
잘린 지느러미와 토막 난 살덩이들은
오늘도 나를 즐겁게 한다. 식탁 옆에서
햇살을 따뜻한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은 네모난 하늘에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
나와 똑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는 그놈의 등을
그녀와 똑같이 생긴 그녀가 쓸어준다.
시력이 사라지면서 졸음이 온다.
나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그놈도
눈꺼풀이 감기고 몸을 솜털 같은 구름에 기댄다.
햇살을 받아 털이 반들거리고
털 아래에는 수많은 그림자가 아직은 조용하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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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
지붕에 창문이 하나 달려있는 케이지를 샀다.
나이에 쫓기고 마감에 쫓기고 슬픔에 쫓긴다고 생각될 때
창문으로 나를 구겨 넣는다.
머리카락으로, 눈썹으로, 별빛으로
찾아오는 신의 손톱들 때문에,
소름이 돋는다. 덜그럭거리며
햄스터는 쳇바퀴를 돌린다. 세상이 헛돌아간다.
햄스터는 톱밥더미 아래로 숨는다.
톱밥더미가 불룩하다, 언젠가의 내 무덤처럼
케이지 지붕에 달이 뜬다, 달이 비추는
내 얼굴은 눈썹만 보이는 아이였다가
탱탱하게 부풀더니
짜글짜글한 노인으로 기울었다.
매일 동쪽은 서쪽으로 끌려간다.
그러는 사이 달은, 아이를 노인으로 만들었다.
구겨진 나를 펴고 방을 나온다.
물 한 모금 먹기 위해 빨대 끝,
쇠구슬 돌리는 습관을 가졌던가.
먹이는 풀숲에 있었던가, 접시에 있었던가.
화병에 꽂혀 있는 조화 몇 송이와
컴퓨터와 책상이 들어있는 케이지를 숨겨둔다.
곧 내 몸에 걸터앉을 눍음을
신은 들여다본다, 어두운 무덤에
나를 미리 묻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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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눈의 경계
어스름이 오는 저녁
날아가는 비둘기 머리 위에서 눈雪이 내렸지.
위에서, j의 배 위에서
펑펑, 나는 내렸지.
그것은 지난날이 되어버렸고
지난날의 우리였고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은 j는
눈眼으로 들어갔지, 그러나 눈雪은 내리지 않았지.
j는 눈眼과 눈雪을 바꾸어버렸지.
눈雪은 시력이 없고. 올해는
최저 임금이 올라갔고
최저 시력은 떨어졌지.
둘의 차이가 수술로 좁혀질까. 눈眼으로
다섯 가지의 안약을 넣으면서 j는 투병 중이지.
눈雪이 올 것처럼
먼 데서 비둘기가 차갑게 날아오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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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구름
흔들리는 구름이거나
눈 감아도 보이는 생각이거나
뒤척이다 돌아눕는, 창밖의 나뭇잎이거나
마취된 얼음 알갱이들,
그 날이 오면 먼지라도 될 수 있는
나는 얼굴에 뿌려진 미스트처럼
환자용 침대에 스며들고 있다.
여행을 하다가 밤에 들었던
풀벌레 소리에 대해 말하고 싶다.
수덕사를 돌아 나올 때
공기를 때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목탁소리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먼지도 될 수 없는 소리를
생각하다 말고,
나는 싶은 수면에 든다.
……, "정신 차려 보세요."
병원 회복실이었나 보다.
간호사가 내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며
먼지를 털고 있다. 그 날이 오지 않아서
잘 털리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린다.
나는 아직 먼지가 아닌가 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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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j의 등 뒤에는 벽이 있고요.
창문 밖에는 뭉치 구름이 있어요.
그리고 머리맡에는 간호사 호출 버튼
j를 상어라 불러요.
이가 없는, 눈이 안 보이는 상어에게
내 월급을 바닷물로 바꾸어 드려요.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아, 가계비
바닷물이 모자라서 상어가 허우적거리네요.
소리 지르다 어디든 쓰러지고 싶은
나는 매미가 되는 꿈을 꾸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고 있는 매미
j의 침애 옆 창문이 가여워
흐리다가 뿌옇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
j, 등 뒤의 벽을 구름 위로 올려놓을게요.
내가 회사가고 없는 사이 급한 일 생기면 버튼을 눌러요
벽이 흘러내리면 간호사가 뛰어 올 거예요.
-전문-
▶ 창문 한 겹 사이의 시詩와 시時_ 정숙자/시인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공기다. 시를 호흡하지 않고서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존재가 시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육지에서 물고기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고, 수중에서 인간이 걸어 다닐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인에게 시는 단순히 호흡만을 돕는 산소가 아니라 질문하고 답하고 괴롭히며 위무하는 총체적 대타자이자 물자체로서 펼쳐진다. 그 거대한 중력은 우주에 실재하는 사건지평선과 다르지 않으므로, 시세계는 한 번 끌려들면 (대개) 돌아 나올 수 없는 제2의 출생지가 되고 그곳의 주민으로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설령 그 삶이 가파르고 외로운 여정일지라도 그 또한 진정 예술가의 모습이요 영예라 할 것이다.
누군지 모를 시인의 시 5편을 이메일로 받았다. 지은이를 모르는 채 작품론을 쓰게 되는 경우는 난생처음의 일.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아직 어느 문예지에서도 이런 기획은 본 적이 없다. 이는 필시 좀 더 냉철한 시 읽기에 목적을 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야말로 형식비평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형식비평이란 콘텍스트(context)를 끌어오지 않고 오직 텍스트(text)만을 읽고 논하는 방법이다. 즉 “달리 말하면 형식비평은 주석이며, 주석은 시에서 암시적인 것을 명시적 또는 논술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훌륭한 주석은 당연히 자기대로의 여러 가지 관념을 시에 불어넣지 않고 시 속에 있는 것만을 읽고 번역한다.”(노스럽 프라이, 『비평의 해부』p.187.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신작시 5편을 한자리에서 읽는다는 것은 시집 한 권을 읽는 것과 맞먹는다. 화자로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일 테고, 그중에서도 각별히 엄선한 작품일 것이며 잡지사의 위도에도 신중을 기했을 터이니 말이다. 오늘 읽은 5편의 시는 우선 이미지텔링과 스토리텔링이 차분한 가운데 직조되었으며, 독자의 마음 깊은 곳에까지 전달되도록 편집되었음을 가늠케 했다. 앞서 ‘차분한’이라는 형용사를 수식한 이유는, 시적 화자의 현재 시점이 “네모 난 창에” 하늘마저도 “네모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환자라는 점에 있다. 「조용한 창문」「비밀의 방」「눈과 눈의 경계」「흔들리는 구름」「j에게」이렇게 제목만 배열해 놓고 봐도 화자와 시간 사이, 아니 시간과 공간 사이에 가로놓인 “창”이 예사롭지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여기서 정지용의「琉璃窓 1」이 떠오르는 게 필자만의 생각일까? 그 비애와 고통이 등가선상에 놓인다.)
「조용한 창문」을 열면 “오늘은 네모난 하늘에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 나와 똑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자 “창문”은 ‘거울’로 환치된다.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 나와 똑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는 것은 바깥 풍경 대신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자기 응시의 액면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눈이 마주쳐도 꼼짝도 않는 그놈”, 보호자가 “그놈의 등을 쓸어주는 장면”까지를 바라보는 가운데 밤이 깊어진다. 그에 따라 “시력이 사라지면서 졸음이” 오고, “나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그놈도/ 눈꺼풀이 감기고 몸을 솜털 같은 구름에 기”대어 고단하고도 애달픈 환자의 하루가 잠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날이 밝아 햇살이 번들거리지만 “아직은” 아침, “수많은 그림자가 아직은 조용하다.”반복되는 환자의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잘 느껴진다.
「비밀의 방」에 들어서면, 역시 화자는 “창문”을 통해 현재의 자기를 비춰볼 뿐 아니라 과거의 시간까지를 데려온다. 남모르는 온갖 추억이 보관되어 있기에 그 공간은 「비밀의 방」으로 명명된다. 창문 하나만이 외부로의 통로이기에 케이지로 은유되고, 자신의 처지가 마치 “햄스터”와 같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언젠가의 내 무덤”으로까지 비약하는 케이지는 자신의 병환이 그만큼 깊어졌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달이 비추는/ 내 얼굴은 눈썹만 보이는 아이였다가/ 탱탱하게 부풀더니/ 짜글짜글한 노인으로 기울었다.”고 회고하는 한편, “매일 동쪽은 서쪽으로 끌려간다./ 그러는 사이 달은, 아이를 노인으로 만들었다.”고 일생을 반추하던 화자는 급기야 “신은 들여다본다, 어두운 무덤에/ 나를 미리 묻는다.”면서 스스로 시간을 해체하기에 이른다. 나약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의 의지마저도 예견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의지와 품위를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눈과 눈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둥글고 푸른 하늘이 아니라 “네모난 하늘”만 바라보던 자아를 벗어나 “날아가는 비둘기 머리 위에서 눈雪이 내렸”던 공간과 시간 속으로, 순결/순백 고도의 기쁨 속으로 자신을 안내하며 정신적 외출을 감행한다. “j는 눈眼과 눈雪을 바꾸어버렸지.”에서 눈(眼)과 눈(雪)은 눈을 바라보는 눈, 다시 말해 현실과 이상의 간격을 좁혀보고자 하는 시도다. 그러나 올라간 “최저 임금”과 떨어진 “최저 시력”이 어찌 좁혀진다 해도 “다섯 가지의 안약을 넣으면서 j는 투병”해야 한다. “눈雪이 올 것처럼/ 먼 데서 비둘기가 차갑게 날아”올 수밖에 없다. 이 문장의 결말에서 언표된 ‘비둘기’와 ‘차갑게’와 ‘날아오지’는 평화의 상징이었던 기존의 비둘기 이미지를 전복시킨다. ‘날아오르는’ 비둘기가 아닌 ‘날아오는’ 비둘기라지 않는가. 그것도 먼데서! 차갑게! 환자에게! 이제 이 작은 시집의 플롯(piot)은,
「흔들리는 구름」이라는 시퀀스(scene)에 도달했다. “그 날이 오면 먼지라도 될 수 있는/ 나는 얼굴에 뿌려진 미스트처럼/ 환자용 침대에 스며들고 있다.” 안개처럼… 침대에… 스며들다니… 논자가 아무리 투철한 잉크를 가졌다 해도… 화자의 이 담담한 기의/기표 앞에서 주석을 단다는 것은 무리이며 사족이다. 구름은 본시 흔들리는 것이지만 저 제목에 차용된 구름은 그저 그런 구름을 넘어선, 화자의 생명이 얹힌 구름이다. 2연에서는 생애에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과 풀벌레 소리와 공기,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내세를 빌어줄 것 같은 “목탁소리”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자신의 젊은 시절엔 누군가를 위해 목탁을 울려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간호사가 내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며/ 먼지를 털고 있다. 그 날이 오지 않아서/ 잘 털리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린다./ 나는 아직 먼지가 아닌가 보다.” 이게 푼크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지막으로,
「j에게」가 펼쳐진다. 왜 이니셜이 대문자가 아니고 소문자일까. ‘에게’와 소문자를 미루어 볼 때 아들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가 없는, 눈이 안 보이는 상어”라면 이 보호자 역시 성치 못한 사람이다. 「눈과 눈의 경계」에서도 “다섯 가지의 안약을 넣으면서 j는 투병 중이지”라는 구절을 봤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아, 가계비/ 바닷물이 모자라서 상어가 허우적거리네요.” 화자가 엄마라면 어찌 “소리 지르다 어디든 쓰러지고 싶은/ 나는 매미가 되는 꿈을 꾸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고 있는 매미”라고 절규하지 않겠는가. “j의 침대 옆 창문이 가여워/ 흐리다가 뿌옇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이상으로 절규하지 않겠는가. 그런 아들이 출근할 땐 엄마한테 당부하는 것이다. “급한 일이 생기면 버튼을 눌러요./ 벽이 흘러내리면 간호사가 뛰어올 거예요.”라고.
이상 다섯 편의 시를 읽어보았다. 그야말로 텍스트만을 더듬었다. 이 시의 모티브(motif)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필자는 작품 안에서 진정성과 간절성에 젖어들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집약되어 감동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곳곳에 나타나는 문장의 은유와 환유 또한 다섯 편의 전체적 조화에 알맞았다고 본다. 2000년대, 특히 2010년 이후의 시단은 매우 활발히, 아니 맹렬히 경계 허물기에 주력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일군에서는 그런 점을 지양하고자 과거로의 진행까지도 감행하는 추세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격언을 새겨봐야 할 때다. 어느 쪽으로든 알맞게, 내용과 기교와 개성을 안배하며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의지와 지성은 동일한 것이다.”(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에티카』p. 27. 조현진 옮김. 책세상. 2006.) 시와 시인세계에서의 의지와 지성은 무엇일까 자문해보는 원단元旦이다. (p.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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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2019-봄호 <POSITION ① 블라인드 시 읽기/시평>에서
* 수피아/ 2007년 『시안』으로 등단,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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