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작품론

정숙자_ 클릭, 버튼, 터치의 시대/ 금붕어의 복수 외 4편 : 정지윤

검지 정숙자 2019. 9. 26. 16:57

 

 

 <『포지션』2019-여름호, 무기명으로 '발표/읽기'되었던 시 5편은

 『포지션』2019-가을호에 정지윤 시인의 작품이었음이 공개됨>

 

 

    금붕어의 복수 외 4편

 

     정지윤

 

 

  수족관의 밤은 푸르다

 

  잠은 어디 있나

  금붕어 배꼽에

  기다란 잠의 똥이 달려 있다

 

  비늘이 다 바랜 금붕어

  감기지 않는 눈이

  잠을 맛있게 뜯어 먹고 있다

 

  업데이트된 새벽은 1초뿐

  충혈된 화면엔

  싱싱한 알들이 자꾸 태어난다

 

  허기진 지도 위의 길들은 거품일까

  낚는 줄 알았지, 처음엔

 

  편의점에서 24시간 카드를 끍는다

  내 모니터와 나는 서로를

  보여줄 때만 믿는다

 

  물속에서

  감기지 않는 눈

 

  잠이 둥둥 떠다니는

  작은 어항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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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뢰딩거의 치킨집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가요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

  선택의 관절은 다 닳았어요

 

  누군가 대신 선택해 주는 결정은

  얼마나 가벼운지

  책임이 없는 사랑을 즐겨요

  프라이드 치킨, 슈뢰딩거의 양념

 

  엄마는 신발이 많은 식당에 가라고 했어요

  다수결은 옳은 것이지만

  나는 둘 중의 하나가 아니에요

  당신의 옳은 습관 탓에 

 

  진열대 위의 나는 불안해요

 

  어떤 것을 기다리는 시간

  애매한 결정을 도와줘요

 

  벨이 울려요

  나는 끝까지 나의 선택을 알 수 없어요

  과정이 나의 것이 되는 순간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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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몽은 언제나 등 뒤에

 

 

  1.

  우리는 포위되었다

  동쪽은 서쪽을, 서쪽은 동쪽을

  끌어안아 깨뜨린다

 

  묻지 마,

  그냥 찌르고 싶었어

 

  화면의 안과 밖에서 사막이 나를 노려본다

 

 

  2.

  랜섬웨어 바이러스

  제목만 남은 폴더들은 아득해

  유적지 같다

 

  모르겠어

  뭘 잘못했는지…… 

  시멘트처럼 딱딱한 바다 위를 난민들이 떠다닌다

  어디로 가야 할까

 

  가상과 현실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파도

  무엇이 무엇을 전복하려는 걸까

  포위된 나는 치명적이다

 

  다시 포맷을 해야 한다

  모두 지우고 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넝쿨장미들이 함부로 담을 넘는다, 현충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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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튼

 

 

  과식을 한 우리가 하품을 하고 있다

  동물원의 꼬리를 베고 누워있는 햇살

  발톱 빠진 의자들이 어슬렁거린다

 

  길 끝에 내장된 두려움이

  잡목들의 겨울 외투를 벗긴다

 

  소리들이 몰려올 거야

  꽃들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수직의 현기증

  두려움은 흥분한 꽃들처럼 가파르다

 

  빈 의지들의 하품이

  겹겹이 쌓여있는 동물원을 빠져나와

  자판기 앞에 이르면

  나무가 길게 버튼을 누른다

 

  우르르 유리를 밀고 나오는 나뭇잎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접수대를

  통과한 구름이 흘러나오고

  종이컵에 나를 한 모금씩 비운다

 

  창밖의 단정한 셔츠 하나

  더위를 빠져나가 흰 버튼처럼

  납작하게 증발한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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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많지만, 선선한

 

 

  다리 잘린 사내가 태풍을 끌고 온다

  범계역 정류장

  계단을 내려가는 사내의 출퇴근은 정확하다

 

  신경을 건드리면

  거짓말처럼 일어서는 미모사

  기어 다니는 노래는 끝없이 증식되는 식물

 

  바닥보다 낮은 몸은 없다

 

  매끄럽게 계단을 빠져나가는 흰 뱀의 다리는 촉촉해

  부푼 쇼핑백이 의지를 들어 올린다

 

  보이지 않는 말을 발췌하는 보도블록

  고무를 덧댄 사내의 긴 꼬리

  바닥과 그는 수평이다

 

  꼿꼿한 나는 꿈틀거리는 수평의 요철을 모르고

  죽은 듯이 흔적은 태풍을 낮은 곳으로 몰고 간다 

 

  구름 많지만 신선한 시간

  겹치는 그림자 위를 그가 기어간다

  잘린 무릎이 면도날처럼 긋고 가는 바닥

     -전문-

 

 

  

클릭, 버튼, 터치의 시대_ 정숙자/시인 

  지질학회의 학자들은 현세(홀로세:Holocene=recent)를 ‘인류세’로 분류한다. 층서학자들의 견해로는 아직 미결정 상태이지만 산업혁명 이후, 특히 1945년 핵실험이 실시된 이후 비약적으로 진화하는 가운데 여섯 번째 지구대멸종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현재를 인류세의 진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먼 훗날 백악기에 이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시기를 ‘인류세’라고 지칭하며 오늘의 문화와 생태, 인간-삶을 연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득한 얘기일 수 있으나, 우리가 지금 2~3억 년 전인 데본기나 페름기에 관한 기록을 읽고 있으니 아주 가당치않은 추측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는 시점이다.

  우리의 문예사조에서도 이미지즘과 상징주의 구조주의를 거쳐, 더는 해체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법한 포스트구조주의에까지 이르렀다. 거기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 고정시킨 개념으로 상징계와 상상계, 그리고 실재계가 확산되었다. 지금 우리 시단에는 상징계와 실재계를 넘나드는 작품들, 혹은 아예 실재계를 현실화한 작품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자칫, 이대로 가다가는 노른자 없는 달걀만을 대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 없지 않다. 이에 발맞추어 과학 쪽에서는 각종 기기를 생산하여 인간을 소외시키는데, 그 편리함이란 감히 당할 재간이 없다. 그 속도감의 접점에;

  다름 아닌, 클릭/버튼/터치가 자리하고 있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너무 달콤하게 우리를 현혹한다. 대신 우리를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너무 씁쓸하게 돌려세운다. 오늘 읽은 다섯 편의 시에서 필자가 얻은 심적 이미지란 바로 그 여파이며 연속이다. 한 편 한 편 작품에 나타나는 실존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며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어느 누구를 표현하더라도 그 구심력은 주체의 사유와 독백이라는 점이다. 현실을 보는 눈과 보아내는 눈. 현실을 앓는 이와 그 곁에서 아파하는 이.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결국 그 주어는 비애로 뭉쳐지기 때문이며, 내일을 세워야 할 현존재이기 때문이다.

 

 

  「금붕어의 복수」에 나타난 “수족관”은 실제로 열대어와 산호초가 하늘거리는 어항이라기보다는 컴퓨터나 휴대폰의 화면이 아닐까 한다. “수족관의 밤은 푸르다”는 데서 블루라이트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연역이다. 제목에서 이미 “복수”라는 어휘가 등장함으로써 이 시 속에서의 주체는 약자이며, 억눌린 환경에서 오는 피로와 우울감이 담보되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금붕어의 복수”라고 하는 것도 직접적인 복수가 아니라 신을 향한 기도에 닿아 있는 염원으로 해석한다. 금붕어는 어떤 복수도 할 수가 없는 신체일 뿐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인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금붕어는 잠잘 때조차 지혜의 눈을 뜨고 있는 존재로서의 존재자가 아닌가. “감기지 않는 눈이/ 잠을 맛있게 뜯어먹고 있다”든가, “편의점에서 24시간 카드를 긁는다”는 상황들이 화자로 하여금 열악한 현실에서의 탈출 욕망을 ‘복수’라는 어휘로 대체했음을 넌지시 일깨워주고 있다.

 

 

   「슈뢰딩거의 치킨집」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대로 전달되는 진실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널리 알려진 바,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논리이며 양자역학은 파동역학이기도 하다. 즉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미시물리학계의 한 분야일 뿐더러 이 양자가 발견됨으로써 휴대폰이나 TV 등 무선 통신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선형적으로 가능했던 예측이 이제는 비선형적/예측불허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결과를 점칠 수 없게 변해 버린 것이다. “진열대 위의 나는 불안해요”, “애매한 결정을 도와줘요” 그러나 “결정”을 도와줄 수 있는 손이 신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 안개에 싸인 그 결정은 곧 운명으로 연결될 미래이므로 우리는 늘 불안한 현재를 견뎌야만 한다. “나는 끝까지 나의 선택을 알 수 없”으므로 “과정이 나의 것이 되는 순간”만을 자각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현대의 삶이며 “치킨집”이고 모두의 아픔이다.

 

  「악몽은 언제나 등 뒤에」그렇다. 미래는 너무나도 앞에, 안개에 싸였기에 알 수 없고, “악몽은 언제나 등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최선’이라는 것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채로 말이다. 전후좌우 훤한 세상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만일 그 세상의 시민이라면 그곳이 즉 천국이며 우리의 이상국인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모든 인류의 바람이요 집단무의식의 환부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포위되었”으며, “묻지 마,/ 그냥 찌르고 싶었어”라니! 피해자와 가해자가 “화면의 안과 밖”에서 “사막”화 되고 있다. 이쯤이면 개인적인 도덕과 사회적인 윤리가 무너진 참상의 단계이다. “넝쿨장미들이 함부로 담을 넘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현충일”을 배치한 화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성찰해야 한다. 이 땅의 오늘을 위해 죽어간 분들의 숭고함과 그 이유를.

 

  「버튼」막 겨울을 벗어나는 동물원의 풍경이다. 아직 상춘객이 북적대기는 이르고, 햇살은 “잡목들의 겨울 외투를 벗”기는 때. “과식을 한 우리가 하품을 하고 있다”는 게 첫 행이다. 곧 “소리들이 몰려올” 테고, “꽃들의 발목”도 잡아당겨져 “수직의 현기증”이 일겠지만, “나무가 길게 버튼을 누”르는 한때. 알고 보면 동물원이란 인간중심주의가 적나라한 현장이다. 나무도 동물들도 어디선가 잡혀온, 갇힌 생명들일진대! 꽃피기 직전의 태양 아래 “하품”이나마 해보는 순간이다. 화자는 자동판매기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를 “버튼을 누른다”고 그려냈다. 이어 “우르르 유리를 밀고 나오는 나뭇잎들”이라고 인간성을 부여한다. 그것도 “나무가 자판기를 길게 누”르는 소이가 “겹겹” 의자들과 “구름”과 “나뭇잎들”한테까지 “한 모금씩” 나누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창밖의 단정한 셔츠 하나”가 걸어가는 모습! 화자의 심상 이미지인 그 모습은 결코 “증발”되지 않을 것이다.

 

  「구름 많지만, 선선한」이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까지 이르렀다. 바닥은 어디에나 있는 바탕이지만 유독 그런 삶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이웃을, 우리는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고 다시 만나게도 될 것이다. 그런 이웃이 눈에 띄는 찰나 우리는 연민에 붙들리게 된다. 그 내적 기류를 화자는 “태풍”이라 적었다. “기어 다니는 노래는 끝없이 증식되는 식물”로 은유했지만, 기실 미모사는 덩굴식물이 아니다. 꽃말은 민감, 섬세, 부끄러움이고 자극을 가하면 잎을 옴츠리며 아래로 늘어진다고 한다. “죽은 듯이 기어 다닐 때 그는 강력해지고/ 족적 없는 흔적은 태풍을 낮은 곳으로 몰고 가”는 사내로부터 화자는 무엇을 보아낸 것일까. “잘린 무릎이 면도날처럼 긋고 가는 바닥”에서 시인은 또 다른, 살아 숨 쉬는 십자고상을 접한 것이다. 눈물겹고도 감사하며, 꽃다운 전언과 위안. 복수심, 불안, 악몽, 두려움, 현기증 등등 “구름 많지만, 선선”함도 있지 않은가, 라고.

 

 

  시란 인류세에 주어진 특수 영역이다. 지번은 없지만 실재하는 정신구역인 것이다. 시인을 곡비라고 일컫는 까닭도 진정으로 함께 울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리라. 심리적 안정과 희망까지를, 즉 의사가 병든 육체를 온전케 하여 다시 살 수 있도록 돕는 역할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시인의 붓은 맑지 않을 수 없고 따뜻하지 않을 수 없다. “역경에 처할 때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나타낸다. 인간이 살면서 행하는 모든 귀결점은 ‘진리眞理가 아니라 진정眞情’이다.”(情繫於中, 行形於外, 凡行戴情, 雖過無怨, 不戴其情, 雖忠來惡, 『淮南子』繆稱/ 계간『예술가』2019-봄호. p.127. 이형우「孝昭王代竹旨朗/條」에서 재인용)

  “편의점에서 24시간 카드를 긁는”, “배달 오토바이”, “랜섬웨어(…)포위된 나”, “발톱 빠진 의자들”, “바닥보다 낮은 몸” 이 모두 화자가 엮어낸 자타의 눈물들이다. 버튼만 누르면 애써 계단을 오를 필요가 없고, 클릭 한번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으며, 가벼운 터치로써 수만리 밖의 사람과 의사소통까지도 가능한 시대. 그렇지만 그와는 반비례로 점점 더 좁아져만 가는 게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며 꿈꾸었던 삶이다. 신속/정확/편리의 정점인 버튼/클릭/터치의 동력이 곧 우리가 앞서 읽은 다섯 편의 시에 나타난 주인공들이니 말이다. 직간접적이든 선험적이든 화자는 진정을 담아 현장의 애환을 채색했다.

   “주체의 변증법이 확립되는 것은 바로 이 소외, 이 근본적인 분열 속에서”(『자크 라캉 세미나 11』p.335. 맹정현·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08)라고 한다. 역사 또한 그러려니와 굽이굽이 부침浮沈을 겪으며 우리의 정서도 굳건해지리라 본다. 뜨겁고 간절한 시편들은 하늘로 보내는 지상의 보고서다. 간혹 신의 존재를 의문하기도 하지만 뉘라서 그 진위를 가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신은 지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최고선의 조건을 반성해볼 때, 영혼의 불사성과 신의 현존은 인간 세계의 윤리 도덕상 합리적으로 요청”(『한국 칸트철학 소사전』p.65. 백종현 지음. 아카넷. 2015)되는 빛이다. (p.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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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2019-여름호 <POSITION ① 블라인드 시 읽기/시평>에서

* 정지윤/ 2015년 《경상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 2016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 등단, 동시집『어쩌면 정말 새일지도 몰라요』 

*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행복음자리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