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이관일_김명순 시인(발췌)/ 유언 : 김명순

검지 정숙자 2018. 5. 8. 16:27

 

 

    유언

 

    김명순(1896-1951, 55세)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하더군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오더래도

  할 수만 있는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그러면서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전문-

 

 

   김명순 시인(발췌) _이관일

 

   최초의 정식 등단 여성 시인 

   김명순은 평양의 지주이자 문신 관료였던 김희경의 소실의 딸로 태어났다. 탄실彈實은 그의 아명이자 필명이었다. 어머니는 기생 출신이었다. 비로 서녀였지만 총명하고 귀엽고 글을 잘 지어 본실 자녀들과 함께 유복하게 자랐다. 1903년 평양 남산현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년 반 만에 3학년으로 진학하는 등 공부를 매우 잘 하였다. 1912년 진명고녀 보통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중퇴하고 귀국했다. 1916년에 숙명고보에 편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했고 그 후 다시 이화여고보에 입학했다.

  이화여고보 시절에는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1809~1848)의 작품을 번역 소개했으며,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돋로 외국어 실력이 뛰어났다. 또한 독일어 노래를 만들어 불렀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있었으며, 미모도 뛰어나 일본 유학 시절 일본 남성들에게 사랑 고백을 받기도 했다. 학교를 마친 후에는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엄친딸'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재능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일본으로  유학, 시부야의 국정여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5년 7월, 도쿄 변두리의 아오야마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하던 중 데이트 상대방인 일본군 소위 이응준(1890~1985,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훗날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이 충격으로 그녀는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구출되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평범한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치부하면서 사실 관계를 왜곡하여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1915년 7월 30일자에 "한 청년을생각하다 못하여 류샤(기숙사)를 빠져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고"라며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당하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은 매일신보 기사처럼 사실을 왜곡하는 소설을 발표했다. 때문에 그녀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김동인의 소설 제목은 『김연실전』이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김명순 시인을 '스캔들로 유명했던 여류 문학가' 정도로 언급하는 등 '방종하고 타락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김연실전』의 주인공을 '자유연애라는 명분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 가해자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이응준 소위는 승승장구 대한민국 국군 최고 자리인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등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성폭행당한 그녀의 고통을 소설을 통해 비아냥하듯 그렸던 소설가 김동인 역시 우리나라 최고 문단의 권력자로 삶을 마쳤다. 비록 친일작가의 낙인이 찍히기는 했지만.(p.p. 55. 56.)

 

  시인은 작품을 통해 미투운동을 계속했다

  그녀의 등단작품에 대해 춘원 이광수는 '천재시인의 등장'이라며 극찬을 했다. 등단 후 그녀는 동인지 '창조'의 유일한 여성동인이 되었다. 그녀가 데이트 도중에 남성(이응준)으로부터 무참하게 성폭행을 당했으나 가해자 이응준은 이를 부인했다. 그러자 이응준 주변의 동료 문인 등으로부터 성폭력과 다름없는 제2차 가해를 당했다. 그것은 피해자를 직접적인 성폭행보다 더 힘들게 만드는 행위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죄으식 없이 성폭력 피해사실을 왜곡하여 피해자 여성을 마치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으로 묘사한 것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당시의 언론과 문인들이 부처겨 김명순을 아예 짓밟아버렸다.

  김명순 시인은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미투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수필 「네 자신의 우헤」에서 자신의 아명 탄실이를 불러대며 "눈물을 거두라. 이제 한 번은 단지 너를 위하여 일어나 보자. 모든 것을 저버리고 모든 인정을 물리치고 이제 다시 일어나자"라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또 다른 수필 「내일 없는 이야기」에서는 "당신들은 나를 비웃기 전에 내 운명을 비웃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지경에 겨우 이르렀어도 힘 있는 대로 싸워 왔노라"라고 역설했다. 1924년에 발표한 자신의 아명을 제목에 붙인 시 「탄실의 초몽」에서도 "온 하늘이 그에게 호령하다/ 전진하라 전진하라"고 노래하여 절망 속에서 "자신의 길을 굽히지 않고 나아"가겠다고 스스로를 북돋우며 자신의 아픈 상처를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김명순 시인의 편이 아니었다. (p.p. 56.. 57.)

 

  * 이 글은 1963년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인기 여성잡지 『여상』에 「병든 장미처럼 져버린 김명순」이라는 제목으로 극작가 이서구 선생이 기고한 글이다. 필자 이서구(1899~1981) 선생은 극작가와 연극인으로 활약했던 분이다. '토월회'를 창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1937년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으로 있으면서 「홍도야 우지마라」「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같은 유명 대중가요곡의 작사를 짓기도  했다. 만년에는 「장희빈」「강화도령」따위의 방송극을 집필하는 극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명순 시인은 때마침 최근 사회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던지고 있는 '미투운동'의 발단을 제공한 분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어서 이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다만 필자 이서구 선생이 김명순 시인을 평가하는 시각이 가부장적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편견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독자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맞춤법만 현행대로 고쳤을 뿐 중간 제목은 물론 내용은 원문 그대로다. (편집자/ P.47)

 

  김명순 시인 소제목들

  p. 47_누가 장미를 병들게 하였는가?

  p. 48_청초한 여류 시인

  p. 49_사과껍질의 삽화

  p. 50_매일신보 여기자 시대

  p. 51_안서岸曙와 그녀

  p. 52_"고범! 나 여기서 살어!"

  p. 52_사나이들의 외면 속에 사라진 말년

  p. 54_100년 전 '홀로 미투' 운동을 시작한 김명순

  p.55_최초의 정식 등단 여성 시인

  p.56_시인은 작품을 통해 미투운동을 계속했다

  p.57_여자들마저 김명순 시인을 외면했다

   p.59_되돌아온 말은 '남편 많은 시인'이라는 조롱 

   (p.61_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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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2018-5월호 <그의 삶 그의 시/ memies>에서 * 이관일/ 시인, 본지 편집스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