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2018-4월호 / 명작의 자리>
한하운, 「전라도길」
최진화
01 시인 한하운
본명은 한태영으로 1919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예술적 재능과 운동 실력도 뛰어났던 그는 이리농림학교, 북경대 농업원에서 공부한 인재였다. 그러나 1936년 18살 꿈 많던 청년에게 나병(한센병)선고가 내려졌다. 병은 쉽게 완치되지 않았고 함흥 본가에서 광복을 맞았으나 집안은 공산당에게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다. 1946년 함흥학생의거 사건으로 수감되었고 이듬해 탈출하여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월남하게 된다.
일생 동안 천형의 나병이 주는 인간고에 시달리며 그것을 시로 승화시킨 시인은 1975년 57세로 작고할 때까지 시집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등의 저서를 남겼다.
02 먼 전라도길 소록도
1949년 서울, 문인들 사이에 명동성당의 방공호에서 노숙을 하며 자신이 지은 시를 팔아서 구걸하는 문둥이 시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시 「전라도길」은 그해 『신천지』4월호에 발표되었고 한하운은 실제로 문단에 모습을 드러낸다. '소록도 가는 길에'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섬으로 쫓기듯 가야만 했던 나병환자들의 여정과 비극적 고통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전남 고흥반도 남쪽 녹동항에서 바라다 보이는 소록도는 1935년부터 조선나예방령에 의해 전국에 있는 나병환자들이 강제이주 되어 격리되었던 섬이다.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된 이후 섬은 자동차로 연결되었고, 지금은 음성 나환자들이 현대적인 병원시설에서 치료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해안가 울창한 송림을 걸으며 소록도의 역사를 알리는 여러 팻발들을 읽어보니 일제 강점기 천형의 병마와 싸워야 했던 나병환자들의 고통이 밀려왔다.
섬의 안쪽 중앙공원에 시인의 시비가 있다. 1939년 환자들이 직접 바닷가에서 끌어다 놓은 빗돌에 1972년 시 「보리피리」를 새겼다 한다. 탁자처럼 넓적한 큰 돌은 하늘을 향해 누워있어서 묘한 울림을 준다.
시인 한하운은 한평생 시를 통해 나병환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였고 사람들의 편견과도 맞서 싸웠다. 그의 시는 섬세한 감수성과 전통적인 민요조의 율격으로 실생활의 체험을 통곡과 애절한 그리움으로 형상화하여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공통적으로 가슴 깊숙이 안고 있는 한을 노래했기 때문일 것이다. ▩ (최진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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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참조>
전라도길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에
한하운(1920-1975, 55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발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신천지(新天地)』(1949.4)에 발표.
* 출전: 옛 시가에서 오늘의 시까지 『우리의 名詩』 편저자 : 편집부/ 김종길 · 이어령 監修/ 주식회사 동아출판사, 초판 1쇄 발행 1990. 2. 25./ 초판 5쇄 발행 1993. 4. 26./ 발행인 : 김현식/ 값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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