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내 뒷모습이 보인다/ 이문재

검지 정숙자 2011. 3. 4. 21:54

    내 뒷모습이 보인다


      이문재



  귀농한 지 사 년째, 이제 겨우 뿌리를 내린 것 같다는 친구 만나러 가는 길, 고속도로 양 옆은 한창 봄날이다

  25톤 트레일러를 앞지르는데, 저런, 세 번째 바퀴가 들려져 있다 나머지 바퀴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내기 직전, 물 댄 논보며 넉넉했던 마음이 갑자기 팍팍해진다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던 오른발에서 힘이 빠져 나간다

  갓길에 차를 대고, 쪼그려 앉아, 온통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자운영이며 민들레를 내려다본다 멀리 순한 산등성이에는 연한 신록이 산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인터체인지에서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게는 저 트레일러의 세 번째 바퀴가 없었다

  스물다섯 이후 나는 늘 과적이고 과속이었다 과잉이었다 가끔 펑크가 나기도 했다 재생 타이어를 쓰기도 했다 마음은 늘 목적지에 가 있었다

  휴게소에 들르지 않아서 그런지 약간 어지러웠다 뿌리를 내려서 그런지 집을 떠나는 적이 없는 친구네 집까지는 사십여 킬로미터

  고갯마루에 차를 잠깐 세웠다 먼 집들, 하나씩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맨손체조를 하고 심호흡 몇 번 하고 다시 차에 타려는데

  저런, 운전석에 누가 앉아 있었다 한 사내가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쿨럭쿨럭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찾아와 울고 있었다


  * 시집『제국호텔』에서/ 2004.12.10 1판 1쇄, 2010.5.17 1판 4쇄, (주)문학동네 펴냄

  * 이문재/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 제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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