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오주리_영원(永遠)의 시인(발췌)/ 동화 : 오세영

검지 정숙자 2016. 9. 10. 14:56

 

 

    동화

 

    오세영

 

 

  그림자를 벗어버려야 나는

  내가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당신의 손목을

  놓고 싶었다.

  입학식에서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학생이 되었다.

  결혼식에서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지아비가 되었다.

  은퇴식에서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백수가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나는

  즐겨

  중력의 함정으로 떨어지는 멧돼지가,

  혹은 빛의 그물에 걸려 퍼덕거리는

  나비가 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당신은 다시

  내 손목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이제 내게 뿌리칠 것이 없어진

  노년의 어느 날

  너 홀로 가라고 당신은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어디선가 피리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바람이 부는

  그 피리 소리에 홀려 어디론가 길을 나서다

  문득 헛발을 디딘 순간 나는

  천 길인지 만 길인지, 벼랑인지, 수심(水深)인지

  아득한 허공을 미끄러 떨어져내렸다.

  나는 그것을 비상(飛翔)이라 생각했다.

  황홀했다.

  막 사정된

  정충(精蟲)이었을까?

  대기권 밖에서

  생명줄을 놓친 우주인이었을까?

  아, 나는 드디어

  그림자 없는 내가 된 것이다.

  갈바람에 팔랑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전문-

 

  영원(永遠)의 시인_ 오세영의 최근작에 부쳐(발췌) : 오주리

  이 시 「동화」"노년(老年)"이란 시어가 표면에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시인은 "노년"이란 더 이상 "손목"을 붙잡아 줄 당신이 없는, 고독한 시기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손목"은 시적 여운이 상당히 깊은 시어입니다. "손목"은 붙잡아 주는 당신에게는 구원(救援)을, 붙잡히는 나에게는 의지(依支)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노년"이란 더 이상 당신과 나 사이에 구원도 의지도 없는 시기라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노년"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고독(孤獨)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시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은 역설적으로 모든 속박(束縛)으로부터 해방(解放)인 것일까요? "노년"의 시인은 유혹(誘惑)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 길을 잃고 "허공"에 이르지만, 그것을 "비상(飛翔)"으로 받아들이며 "황홀"의 감흥(感興)을 느끼는 경지에까지 다다라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노년"은 진정한 의미를 몸소 깨닫고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시기임을 시인은 보여주고 있는 듯도 합니다. 그것은 장년(壯年)의 나이에 가장 많은 사회활동을 함으로써 가장 개인적인 자유가 적어지는 생활과 대조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노년"은 고독 한가운데서, 해방된 진정한 자기자신을 만나고, 자기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데 비상의 황홀을 느끼는, 시인만의 해방이 함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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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세계』 2016-가을호 <시인산책|신작시오세영론>에서

  * 오주리/ 2010년 『문학사상』에 시로 등단, 현재 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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