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밤
니시 가즈토모(1929~2010, 향년 82세)
한성례 옮김
이슥한 밤에 한 소년이 거리를 걷는다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이다
1945년 여름
미군이 들이닥치던 밤 나도 일본의 마을을 걸었다
2007년 일본의 북쪽 마을
겨울밤은 영하 10도
소년은 책이 잔뜩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
코트 깃을 세우고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걷는다
젊은 경찰이 다가와 소년을 검문한다
나이 든 경찰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마디 한다
"이제 그 정도면 됐어. 얘야 추우니까 조심하렴"
소년은 "고맙습니다"라고 답한다
소년은 걷다가 중얼거린다
"저건 수정의 밤*"
소년의 머릿속에는 가방 속에 든 책
파울 첼란*의 시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저 멀리 화물열차가 달려가는 소리
소년은 그때 문득
시베리아로 유배 간 러시아 작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소년의 머리는 뜨겁다
깊은 밤의 바닥에서 시는
항상 그렇게 성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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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주>
* 수정(水晶)의 밤 : 독일어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를 가리킨다. 1938년 11월 9일 나치 대원들이 독일 전역의 몇 만 개에 이르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50여 개 유대교 사원에 방화했던 날이다. 당시 깨진 유리의 무수한 파편들이 아침 햇살에 수정처럼 빛을 발했다고 해서 수정의 밤 사건으로 불린다.
*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 : 루마니아 출생의 유대계 독일어 시인. 21세 때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부모를 잃었고 자신도 가스실 처형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살았다. 종전 후 소련군이 점령해오자 오스트리아 빈으로 피신하여 첫 시집 『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를 발표하였고, 파리에 정착하여 프랑스어 · 러시아어 · 어학교사 겸 번역가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활약했다.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할 때까지 『기이함과 기억』『말의 울타리』등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으며, 시집『양귀비와 기억』에 수록된 「죽음의 푸가」는 현대시의 고전이라 일컬어진다. 사물을 금욕적일 만큼 응축된 시어로 담아냈고 투명하고 순수한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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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우리 등 뒤의 천사』에서. 2015.11.7. <도서출판 황금알> 펴냄.
*니시 가즈토모(西一知): 1929년 요코하마(橫浜) 출생. 어려서부터 글짓기와 책 읽기에 열중하여 문학세계에 심취했고, 18세 무렵부터 『희망』을 시작으로 여러 교내 문예지를 발간한다.
1954년 니시 다쿠(西卓)라는 필명으로 첫 시집 『물의 치장』을 출간한 이래,
1956년 『커다란 돔』
1958년 『말라버린 씨앗』
1968년『무엇이 우리 영혼을 달래나』
1978년『꿈의 조각』
1988년『순간과 장난』
1995년『일그러진 초상』
2012년『사랑에 대하여』등 다수의 시집이 있다. 그 밖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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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시론집『상상력과 감각의 세계』
1976년 시화집『혼례』
2003년『시의 발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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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전위시 문학지 『선인장 섬』에 참여한 후로,
1952년 『LE NOIR』
1954년『조(像)』
1955년『바우 VOU』
1958년 『소조(想像)』등의 시문학지 동인으로 활동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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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겐손(現存) 창간』
1968년 『시토시소(詩と思想)』(월간 시문학지) 기획과 창간, 『바쿠(獏)』의 복간 등에 참여했다.
1975년 계간 시문학지 『후네(丹)』를 창간했다.
2007년 오쓰보 레미코(大坪れみ子) 시인이 창간한 시와 시론지 『새로운 천사를 위하여……』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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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후네』를 오쓰보 레미코 시인이 이어서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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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례/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세종대학교 일문과와 동 대학 정책과학대학원 국제지역학과 일본 전공 석사 졸업.
1986년『시와 의식』으로 등단했으며, 한국어 시집『실험실의 미인』, 일본어 시집『감색치마폭의 하늘은』『빛의 드라마』등이 있고, '허난설헌문학상'과 일본에서 '시토소조상'을 수상했다.
번역서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붓다의 행복론』 등이 한국 중고등학교 각종 교과서의 여러 과목에 실렸으며, 『달에 울다』『파도를 기다리다』등 다수의 소설과 에세이, 인문서 등을 번역했다.
또한 시집『골짜기의 백합』『암호해독사』등 일본시인의 시집을 한국어로, 고은, 문정희, 정호승, 김기택, 박주택, 안도현 등 한국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등 한일 간에서 다수의 시집을 번역했다.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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