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동화_ 모르드개 이야기/ 구은영

검지 정숙자 2015. 10. 1. 15:11

 

   <동화>

 

 

  모르드개 이야기

 

   구은영

 

 

  "에스더야, 네가 이제 왕후가 되다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삼촌과 숙모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겠느냐."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어깨를 감싸안고 토닥거려 주다가 이내 목이 매었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 이 두 사람은 사촌 남매 사이였습니다. 부모를 여의고 혼자 남은 나이 어린 에스더를 모르드개는 딸처럼 극진히 돌보며 키웠습니다.

  "다 오라버니 덕분이어요."

  동생의 진심 어린 대답을 들으며, 오빠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야, 한 가지 부탁이 있단다. 우린 나라를 잃었지 않느냐? 네가 유다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한에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네 그럴게요, 오라버니."

  모르드개 말이라면 언제나 두 말 않고 따르는 에스더였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유다 사람으로, 유다가 바빌론에게 망하자 포로가 되어 발벨론으로 사로잡혀 온 것입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은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나라를 가지고 있던 때보다 더욱 간절해지는 것인가 봅니다.

  세월은 흐르고, 바벨론은 이웃 나라 바사 제국에게 정권을 넘겨 주고 말았습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며 왕후를 쫓아내고, 새로운 왕후를 찾게 되었습니다. 많은 궁녀들이 일 년여 동안의 몸단장을 마치고 왕의 앞에서 선택을 기다릴 때, 왕은 에스더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에스더가 새 왕후가 되어 왕궁으로 들어간 뒤, 모르드개는 대궐 문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도 모르드개는 왕의 내시 두 사람이 왕을 죽이려 모의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모르드개는 급히 사람을 시켜 왕후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왕후는 깜짝 놀라 왕게게 사실을 알렸고, 왕은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지켰던 사실은 궁중 일기에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즈음, 왕은 새로운 총리로 하만을 임명하여 나랏일을 맡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모두 하만을 보면 무릎을 꿇어 인사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모르드개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각 사람들은 아말렉 족속으로 예로부터 유다의 적군이었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모르드개는 괴워하였습니다.

  '유다 사람인 내가 대적인 아각 사람 하만에게 무릎 꿇고 절을 한다?"

  유다 사람으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모르드개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궁인 수산궁문을 드나드는 하만을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모르드개는 하만을 보고도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옆에서 이를 본 한 신하가 보다 못해 물었습니다.

  "자넨 왜 총리대신에게 절하지 않는가? 그건 왕의 명령을 어기는 걸세."

  그러자 모르드개는 비로소 자기의 민족을 밝히고 말았습니다.

  "나는 못하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나 여태 입을 다물고 있었네만, 나는 유다 사람이라네. 그러니 어찌 민족의 대적인 아각 사람 하만에게 무릎을 꿇겠는가."

  "허허, 그렇게 고집부리다간 큰코다칠걸세. 마음을 고쳐 잡수시게나."

  그의 충고는 계속되었지만, 모르드개의 허리는 좀처럼 굽힐 줄 몰랐습니다. 마침내 모르드개가 유다 민족이므로 아각 사람인 총리에게는 절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더니, 급기야 누군가 하만의 귀에까지 속삭이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하만은 수산궁문을 들고날 때마다 모르드개를 눈여겨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들은 대로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어제도 인사하지 않더니 오늘도 인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제 총리는 모르드개만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놈을 처치해야겠다." 하고 하만은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더욱 큰 결정을 내리고 싶었습니다.

  "아니지, 그 민족의 씨를 아주 말려 버리고 말 것이야." 하고 중얼대는 그의 눈은 이미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만은 왕의 허락을 얻어내기 위하여 갖은 수법을 다 썼습니다.

  "그대 생각이 옳다 하면 그대로 행하도록 하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만은 하루 날을 정하여 일백이십칠 도 전 영토에 있는 유다 사람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아다가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으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르드개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굵은 베옷을 입고 대궐 문 앞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하였습니다. 이를 본 많은 유다인들이 나와, 때를 거르며 모르드개와 함께 브르짖었습니다. 

  왕후의 시녀가 헐레벌떡 내전으로 들어와 에스더에게 모르드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곧 내시를 불러 무슨 일인지 알아 오라 지시하였습니다. 모르드개의 설명을 왕후에게 전하면서 내시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니 왕후께서는 전하께 속히 나아가셔서 이 일을 막아 달라십니다."

  내시의 말을 듣고 왕후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라버니, 어쩌면 좋아요? 참으로 중대한 일이오나, 제 사정도 들어 보시어요. 저도 전하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지가 한 달이 되어요. 부르심도 없이 전하께 나아갔다가는 그 누구라도, 왕후라 할지라도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오라버니도 잘 아시겠지요."

  내시가 전하는 전갈을 받고, 모르드개는 왕후가 왜 이다지도 답답할까 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내시에게 다시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일렀습니다.

  "네가 왕궁에 있다고 해서 안전할 것 같으냐?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해서라면 어쩌겠느냐?"

  오라버니의 이 말을 전해 듣자, 에스더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어요, 오라버니. 그러니 어서 댁으로 돌아가시어요. 오라버니와 저, 몸은 떨어져 있지만, 유다 사람들과 함께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사흘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하시어요. 사흘 뒤에 저는 전하를 뵈러 나갈게요. 약속할게요, 오라버니. 전하께서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왜 왔느냐고 죽인다 하시면, 죽으면 되는 것이어요."

  모르드개도 동생의 목숨 건 결심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에스더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그들의 사흘이란 특별한 시간이 모두 지나갔습니다. 왕후의 예복을 갖추어 입은 에스더는 마침내 왕궁의 안뜰로 들어섰습니다. 에스더의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터라, 왕의 허락도 없이 왕궁에 들어서는데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왕이 노해서 자신을 내쫓는다 하여도, 유다 사람들 죽이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더욱 다짐하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뜻밖에도 왕의 다정한 목소리가 에스더의 귓가에 들려왔습니다.

  "오, 왕후가 어인 일이오? 어서 이리 오시오." 하고 왕은 반색하였습니다. 왕은 왕후의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후를 보자마자 소원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럴수록 에스더는 더욱 더 침착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 말씀 드리온데, 오늘 잔치에 하만과 함께 와 주시오소서."

  왕후의 초대에 왕은 기꺼이 그러마고 답하였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기도 전인데, 왕은 또다시 왕후의 소원부터 물었습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줄 터이니, 그대의 소원을 말해 보시오."

  하지만 에스더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이뢰옵기 황공하오나 내일 잔치에도 하만과 함께 와 주시오소서. 소원은 내일 아뢰겠사옵니다."

  하만은 모든 대신을 다 제치고, 자신만이 두 번씩이나 왕후의 잔치에 초대된 것에 마냥 우쭐하였습니다. 그러나 대궐 문을 나서는 순간,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보고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만은 집에 돌아오자, 친구들을 모아들여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여보게들, 전하의 총애로 총리까지 된 내가 무엇이 부족하겠나? 명예가 없는가, 처가 없는가, 자식이 적은가. 그런데 딱 하나, 저 대궐의 문지기녀석의 수작이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네."

  그러자 아내와 친구들은 입을 모아 곧바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총리인 자네가 그까짓 것 가지고 고민하다니, 원. 체통 좀 세우게나. 당장 내일이라도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버리게나 그려."

  하만은 그 길로 그대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왕은 그날 밤 공교롭게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궁중 일기를 가져와 읽도록 하라." 하고 명하였습니다. 일기에는, 얼마 전 일어날 뻔하였던 왕의 암살 모의 사건의 내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모르드개의 빠른 신고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 이 모르드개에게 무슨 상을 베풀었는고?" 하고 왕은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에게 상을 베풀고 싶어 마음이 급하였습니다. 생명을 구해 준 은인에게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다니, 그것은 정녕 안 될 말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나무를 세우려고 왕궁 뜰에 이른 하만은 왕에게 불려 들어갔습니다.

  "내가 높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어떻게 상을 주어야 하겠는고?" 하고 다짜고짜 묻는 왕에게 총리는 마음이 들떴습니다. 왕이 높여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보나마나 자신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상을 내게 내리시려는고, 이 꼭두새벽에?' 하고 마냥 의기양양해진 하만은 왕게게 거침없이 아뢰었습니다.

  "전하처럼 왕복을 입히시고 왕관을 씌워서 전하께서 타시는 말에 태우소서. 그리고 신하를 시켜 성중거리로 다니며 자랑하라 하소서. 전하께서 높여주고 싶은 자에게는 이렇게 하실 것이라 외치라 하소서."

  "자 그러면, 이제 당장 네가 직접 모르드개를 말에 태워 방금 네가 한 말대로 빠짐없이 그렇게 속히 행하도록 하라." 하고 왕은 담담하게 명하였습니다.

  "앗!" 하만은 순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자기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를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자신이 말한 그대로 그렇게 입히고 씌우고 태워서 거리로 말을 끌고 다니며 외쳐야 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굴욕감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온 하만은 아내와 생각 깊은 한 친구에게서 호된 말을 들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유다 사람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네."

  이래저래 실망에 빠져 다리가 후들거리는 하만이었지만, 초대받은 그로서는 왕후가 베푸는 잔치에 또다시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잔치가 시작되자, 왕은 왕후의 소원을 알고 싶다며 재촉하였습니다. 왕후의 입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전하, 저를 살려 주시옵소서. 제 민족을 살려 주시오소서. 아예 민족의 씨를 말린다 하지 않사옵니까?" 하고 에스더가 애원하였습니다.

  "아니, 감히 누가 그러는고?" 하고 왕이 놀라 소리 질렀습니다.

  에스더는 마침내 함께 앉아 있는 하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여기 이 하만이어요, 전하!" 하고 아뢰는 에스더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습니다.

  "무엇이라고?"

  아하수에로 왕은 놀라고 화가 치밀어 벌떡 일나서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만은 살려 달라고 에스더에게 애원하였습니다. 왕이 다시 돌아왔을 때, 하만은 왕후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려 계속 애걸복걸하고 있었습니다.

  "어허! 저 자가 이제는 내 앞에서 왕후를 겁탈하고자 하는가?" 하는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하만은 끌려 나갔습니다. 하만은 이제 에스더의 고발이 아니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한밤중에 세워 놓았던 높다란 나무에 그만 하만 자신이 달리고 말았습니다. 왕후는 비로소 모르드개는 자신의 사촌이라고 왕에게 소개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날로 백성에게 그 명성이 알려져 넓은 영토 곳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유다 사람인 모르드개는 마침내 아하수에로 왕의 뒤를 잇게 되었고, 백성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였으므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 이 이야기는 성경 속의 인물인 모르드개의 이야기를 토대로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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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2015-10월호 <동화>에서

  * 구은영/ 1988년『아동문예』로 등단. 저서『아부지 아부지』『다섯 개의 방』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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