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시와사람』2015-여름호/ 문학과 미술의 만남-2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과 김승희_ 정숙자의 시
강경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흔히 그를 생각할 때 「모나리자」,「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기 일쑤이지만, 그는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로 조각 · 건축 ˙ 토목 ˙ 수학 ˙ 과학 ˙ 의학 ˙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 예를 들면 방적기 ˙ 이중연사기 ˙ 베틀기계 ˙ 바늘이나 줄칼 연마기 등을 디자인하였으며 심지어는 잠수함 ˙ 비행기를 설계하는 등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실용성에까지도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도시를 정비하거나 사원을 건축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사기술에도 관심을 보여 전쟁무기 ˙ 공격용 사륜마차 등을 실제적인 응용단계에 이르도록 하였다. 오늘날에는 흔한 무기이지만 연발탄 ˙ 수류탄 ˙ 돌발탄 같은 다양한 무기들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상상력은 당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그의 창의적인 상상력을 배우려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대를 뛰어넘는 넘치는 열정과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가문인 다 빈치에서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안토니오 다 빈치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에 이론 교육보다는 실용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다. 포도주 ˙ 기름 ˙ 밀가루를 생산하는 농촌에서 농부의 지식을 직접 흡수하였다. 또한 도자기업을 하는 할머니의 가마에서 온갖 도기, 특히 채색 토기를 구워냈다. 도자기 기법을 익혔던 이러한 체험은 그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예술가는 싹순부터 다를까? 그는 이상하게도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 누가 시켰거나 자신이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글씨를 뒤집어 썼다. 이는 훗날 그가 쓴 여러 문서에도 나타나는데 성인이 되어도 글씨를 뒤집어 쓰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러한 습관은 오히려 예술가의 기질, 또는 창의성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1469년 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버지의 친구인 베로키오의 작업장에 들어가 견습을 한다. 여기에서 그의 습작기를 보낸 셈이다. 이때 그는 공방에서 한 가지 직종인 갈고 닦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뎃상뿐만 아니라 회화에 열중하였는데 특히 그림 그리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그의 스승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6~1488)는 금은 세공사 ˙ 원근법의 대가 ˙ 조각가 ˙ 판각사 ˙ 화가 ˙ 음악가로 공방의 사업주이기도 하여 일을 수주받아 협조자들이나 제자들을 시켜 완성시켰다.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다 빈치는 훗날 르네상스의 3대 대가로 인정받는 보티첼리와 함께 하였다.
다 빈치의 생애는 제 1차 피렌체 시기(1466~1482), 제 1차 밀라노 시기(1482~1499), 제 2차 피렌제 시기(1500~1506), 제 2차 밀라노 시기(1506~1513), 로마, 앙부아즈 시기(1513~1519)로 나눠 활동하였다.
제 1차 피렌체 시기인 1473년 21세에 다 빈치는 「산타마리아 델리네베의 풍경」을 그렸다.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에서 최초의 진정한 풍경화'로 일컬어진다. 풍경화는 극동미술에서 흔히 다루어진 주제였다. 이 그림은 그의 고향에 관한 기록이다. 입체감과 공간감, 안개와 그늘은 강한 활력에 의해 고무되고 있다. 그림의 필치는 현상세계 속으로 침투하려고 애쓰는 예술적 ˙ 과학적 ˙ 시적 ˙ 우주적 탐구정신 과정을 표현하고 옮겨 쓴다. 선영(線影)의 작품에 의해 빛을 떨게 만듦으로써 풍경화의 밀도와 투명성을 부여하였다. 마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다 빈치는 1482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에 갔다. 밀라노에서 「암굴의 성모」를 그린다. 장면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함으로써 빛 속에서 갑자기 드러나는 요소들에게 진정한 드러남의 힘을 부여하고, 인물 ˙ 후광 ˙ '부차적인 빛'의 반사광을 정신의 발산처럼 보이게 하는 이 방법을 레오나르도파 기법이라고 한다.
이 기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수많은 비밀과 암시로 가득한 신비한 기호들을 특별히 종합해 놓고 무한한 상징적, 신화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동굴은 모태인 동시에 지식의 공간이다. 이것은 신비론적인 서정성과 불가사의의 어조를 띤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로운 종교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산들은 끝나지 않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지질학적인 우주를 표현한다.
1487년 다 빈치는 이론적이고 실용적인 지식, 예술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정비하고 함리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수첩에 온갖 종류의 메모를 하였다. 그리고 체계적인 논설문을 작성하였다.
그는 이른바 '이론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예술에 대한 커다란 꿈을 키웠고, 그것을 유토피아 안에 투사하였다. 역학, 물리학, 해부학 개념을 비행술에 적용하였다. 그러면서 기류, 기하학적 동체, '수학법칙에 의해 작용하는 기구'로 해부된 새의 중심(重心), 저항, 변동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공기역학에 몰두하였다. 더불어 그는 잠수함도 구상하였다. 이렇듯 당시로서는 엉뚱한, 그러나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그에게 비행은 유토피아의 절정· 신의 경지에 오른 기술자가 숭고하고 경이로운 것을 창조하는 꿈을 상징한다.
건축학과 도시계획 분야에서 다 빈치는 '전위적'예술가였다. 밀라노 대성당 채광탑의 목재 모형이 그의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1493년 다 빈치는 밀라노의 복원과 확장을 위한 시안을 구상한다.
이 무렵 다 빈치는 해부학적 지식을 심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인체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었는데 특히 인간의 영혼이 온몸에 퍼져 있지 않고 그의 한가로운데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마침내 감각을 지각하는 우두머리에 의해 영혼을 중앙의 뇌실 안에서 섬김을 받는 군주로 '신경과 근육'은 대장을 섬기는 병졸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다 빈치의 호기심은 연극과 축제에도 미쳤다. 연극과 축제를 사랑하여 순간적인것, 기분풀이, 꼭두각시, 경이로운 것들의 연극은 그에게 직감과 그가 발명한 기계들을 확인하고 문학 ˙ 심리학 ˙ 무의식적인 동작 ˙ 상징학에 대한 새로운 정열을 표현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 되었다. 또한 화가 다 빈치는 과학적 유토피아에 속하며 현실을 넘어선 신세계, 즉 기술적 상상력에 관한 '시'의 세계를 예고하는 통합기술에 속하는 새로운 기계들을 그렸다. 그런 점에서 다 빈치가 결의에 찬 태도로 괘종시계와 방적기 연구에 매달린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이른바 레오나르도파 기법이라고도 불리는 '레오나르도적 스푸마토'는 부피 ˙ 넓이 ˙ 깊이 ˙ 색채와 같은 예술 개념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대상을 둘러싼 상호작용, 그리고 그들간의 자연적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때 스푸마토를 좌우하는 것은 물체 표면에 따른 색채의 무한변화이다. 다 빈치는 빛보다 그림자 쪽에 중점을 두어 이론을 전개했다. 그림자를 질과 양, 종류와 형태 등 여러 관점으로 분류했으며, 그림자를 원시적이며 파생적이고 반사적인 것으로 정의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만찬」에서 '사도 필립보' 부분을 명암법을 사용했는데 그의 인체는 맑고, 투명한 빛 속에 한껏 적심으로써 반짝임을 강조하였다. 그럼으로써 윤곽선에 부조의 느낌을 부여했다. 그러나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입체감 있게 표현된 얼굴로 빛과 그림자의 변화하는 효과를 드러내준다. 인물과 풍경을 통합하는 시각적 본질을 형성한다.
다 빈치는 신체언어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구체적인 느낌의 인간형상을 묘사했다. 그는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모든 동작과 사고, 감정의 매개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동방박사의 경배」, 「최후의 만찬」등은 각기 다른 나이, 특징, 의도, 느낌을 지닌 인물 모두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감정적 효과 떄문이다. 다 빈치는 동작과 몸짓이 인물의 정신적 ˙ 감정적 내용까지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 빈치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원근법이다. 예술과 과학의 융합이라는 독창성은 다 빈치의 성공을 결정짓는 기본 토대였다. 기존의 이론과 추상보다도 일상경험의 사실성을 부각시키는데 몰두하였다. 가령 기존의 화가들은 고정점의 관찰자만 전체로 했지만 다 빈치의 접근법은 통시적인 것이었다. 선 원근법, 수학적 원근법과 더불어 색원근법과 소실점 원근법을 착안하였다. 이러한 가설을 작품 속에 적용시켰다.
또한 다 빈치는 인간의 관상학에 대한 연구가 그림 속에 반영되었다. 그림을 통해 본질을 포착하려 했던 그는 외설, 음탕, 기괴, 그로테스크 같은 측면을 잘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기형과 변칙을 통해 얼굴 특징 및 기질, 해부학과 관련되는 인간유형의 목록을 세분화했다. 당시 얼굴 표정은 세속문화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였다. 다 빈치의 그로테스크이미지 열풍은 16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훗날 무의식의 발견과 더불어 정신분석학이 학문의 영역으로 활용되면서 다 빈치의 그로테스크한 환각적 이미지들은 정신이상 치료나 정신분석의 맥락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최후의 만찬」은 산타마리아 델라그라치교회의 수도원 식당 벽에 그려진 것으로 유다의 배신이 알려지는 순간의 성만찬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15세기 페렌체에서는 다 빈치 이전에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나 기를란다요에 의해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로 그림이 그려졌다. 이들 그림들은 유다 한 사람만이 식탁 건너편에 배치되어 있는 구도이다. 그러나 다 빈치는 유다를 열두 제자 속에 포함시켜 열두 제자를 세 명씩 무리 짓는 구도를 취했다. 이전 작가들이 유다의 배반에 초점을 맞췄지만 다 빈치는 화면의 조형성에 초점을 맞춘 획기적인 작품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종교적 상징성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세 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제자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네 복음서, 그리고 예루살렘의 열두 문 등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정확한 원근법으로 짜여있지만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원근법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없도록 되어 있어 일상적 차원이 아닌 이상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내용과 형식에서 독창적인 이 작품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평가되어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다 빈치의 걸작이랄 수 있는 「세례요한」은 어두운 검정을 배경으로 오른손 검지를 위로 향하고, 왼손은 가슴에 댄 채 십자가를 들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다. 흔히 '세례요한'을 어린 아이나 중년 남성으로 그린 것에 반해 다 빈치는 젊은이로 그려내 생기가 넘치고 매우 사실적이다.
이 작품은 다 빈치가 평생 연구한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의 테크닉이 적용된 그림이다. 검은 배경에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젊은이의 표정은 모호하지만 신비롭다. 그리고 얼굴 표정은 매우 섬세하다. 머리카락과 털옷의 표현 또한 스푸마토와 키아로스쿠로를 극대화함으로써 뚜렷한 선이 없다. 음영의 농도가 자연스럽다. 그런 까닭에 인물의 입체감이 더욱 생생하며 사실적이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인물이 베일에 싸여 신비스러운 인상을 주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중세의 봉건사회에서 인류문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르네상스의 천재 다 빈치의 그림들은 주로 성서 속의 인물과 정황을 그렸다. 물론 「모나리자」, 「지네브라 데 벤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등의 초상화와 신화적 주제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 빈치는 거의 평생을 「수태고지」에서 출발하여 「성모자상」그리고 성경 속의 정황 등을 회화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다 빈치를 떠올릴 때 역시 「모나리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은 다 빈치가 1503년에서 1515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다 빈치의 모든 감각과 통찰이 집결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극도의 섬세함과 세부묘사가 돋보이기 떄문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시간과 공간 사이에 퍼져있는 자연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크 델 조콘라를 위하여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이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이어서 '리자'는 조콘다 부인의 이름이니 모나리자는 '리자부인'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인 모나리자는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으로 눈썹이 없다. 그러나 애초부터 다 빈치가 눈썹을 그리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다. 주문받아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사실적으로 그려야 했기 떄문이다. 다 빈치가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여러 번 유약으로 특수처리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지거나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주인공의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의 자연스러운 미소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이 그림에 대해 수많은 말들이 있어 여전히 모나리자의 미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과 호기심을 제공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시인들 역시 모나리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나라의 김승희 시인과 정숙자 시인이 모나리자에 대한 시편을 써서 관심을 표명하였다. 김승희 시인은 「뚱뚱한 모나리자」라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비만과 욕망의 간격을 펼쳐보이고, 정숙자 시인은 청각장애인의 내면을 보여준다.
어마어마한 살덩어리
막을 수 없는 증식의 반죽덩어리
물속에서 퉁퉁 불은 듯한
부풀어오른 얼굴에 손가락을 넣어봐
밀가루의 무저갱으로 아득히 빨려들어가는 손가락
야식증후군일 거야
몽유의 발걸음은 냉장고 속으로 출렁출렁 빨려들어 가고
해적선, 밤의 약탈로 메워지는 입,
통닭 한 마리를 밤에 혼자 다 먹었다니까
먹은 기억은 못하지만, 아침에 쟁반에 수북한 닭뼈들,
그것과 출렁거리는 뱃살만이 유일한 증거,
낮이면 하얀 실크에 십자수를 놓은 얌전한 수예가인지도 몰라
한밤중에 머리를 풀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폭식증의 여자
미소, 어두운 심해의 우울증에서 뻗어나오는 방만한 미소,
무시무시한 살덩어리가 움직이는 출렁거리는 비만의 미소.
몸을 증오하고 먹음직스런 세상의 모든 것을 증오해야 하는,
파묻히고 싶은 매몰의 죽음 충동을 일으키는,
뚱뚱한 여인의 환상의 끝은
매몰, 함께 죽자고 할 수는 없을 거야.
함께 죽을 순 없을 거야
뚱뚱한 매몰의 끝은 천국인지, 지옥인지,
나는 숨쉬고 싶다
뚱뚱한 턱과 산맥만큼 부풀어오른 가슴에 파묻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호들거리는 모나리자,
야식증의 어마어마한 모나리자,
간신히 숨쉬는 모나리자
비만 진료소 벤치에 앉아 있는 미소의 어머니
-김승희, 「뚱뚱한 모나리자」전문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을 표현하였다. 특히 모나리자의 미소는 신비스럽다. 이 유명한 미소는 관심과 무관심을 동시에 함축하며, 비현실적이고도 추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림 속의 주인공이 오른손을 왼손 위로 얹고 정숙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김승희 시인을 만나 모나리자는 뚱뚱한 여자가 되고 만다.
이 그림이 루부르박물관에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림 속의 여인을 흡혈귀, 키마이라, 스핑크스, 가짜변태, 사랑의 대상, 세속적 성모, 대단한 매춘부 ˙ 요부, 양성의 상징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모나리자는 사람들에 의해 임신 또는 질병의 징후를 적발했다고도 했고, 세이렌, 푸랑수아 1세의 정부, 아틀란티스의 여왕의 신분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모나리자는 화가들에 의해 뚱뚱하게 그려지거나 특히 마르셀 뒤샹은 수염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 빈치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역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를 즐겁고 싱그럽게 하기 위한 것은 부인이 정숙한 포즈를 취하도록 노력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김승희 시인을 만나 모나리자는 또 다시 뚱뚱한 여자가 되고 만다. 그림만으로는 여자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내기 쉽지 않다. 김승희 시인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모나리자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비만의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어마어마한 살덩어리"의 여인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마치 "물속에서 퉁퉁 불은 듯한/ 부풀어오른 얼굴"인데 그 얼굴이 밀자루 반죽 같아서 손가락으로 찌르면 "밀가루의 무저갱으로 아득히 빨려들어가는 손가락"이 느껴질 정도의 비만이다. 화자는 "야식증후군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화자는 여자가 왜 뚱뚱해졌는지를 생각해본다. "낮이면 하얀 실크에 십자수를 놓은 수예가"일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한밤중엔 머리를 풀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폭식증의 여자"의 여자는 우울증 환자라도 되는 걸까. 여자는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것은 온전한 미소가 아니다. "어두운 심해의 우울증에서 뻗어나오는 방만한 미소"이며 "무시무시한 살덩어리가 움직이는 출렁거리는 비만의 미소"이다. 여자는 우울증에 걸려 "몽유의 발걸음은 냉장고 속으로 출렁출렁 빨려 들어가고" "통닭 한 마리를 밤에 혼자 다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쟁반에 수북한 닭뼈들"이 야식증후군의 여자가 통닭 한 마리를 다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출렁거리는 뱃살"이 여자가 밤에 무엇을 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불만, 또는 자신에 대한 불만, 또는 불안을 해소시키는 방법으로써 폭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물만과 불안을 해소시키는 폭식을 하는 우리 사회는 병적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환자이다. 불만과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해 폭식을 하다보니 비만이 되고 여자는 그러한 자신의 "몸을 증오하고 먹음직스런 세상의 모든 것을 증오해야 하는" 악순환의 세계가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이 아닐까. 불만과 불안의식 때문에 "파묻히고 싶은, 매몰의 죽음 충동을 일으키는,/ 뚱뚱한 여인의 환상의 끝은/ 매몰"일까. 그렇다고 "함께 죽자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몸과 정신이 병들었어도 모두 함께 죽자고 생각하는 비정상적인 정신으로 변질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의 상징이랄 수 있는 '뚱뚱한 모나리자'를 통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인간의 탐욕을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뚱뚱한 모나리자는 "숨쉬고 싶다" 즉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몸을 상품화시키는 자본주의는 특히 여성의 몸을 상품화시키고 있다. 날씬하거나 늘씬해야 그 가치가 인정된다. 그런데 "뚱뚱한 턱과 산맥만큼 부풀어오른 가슴에 파묻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미적 기준으로써의 완벽성을 지녔다면 오늘날 뚱뚱한 여자는 이와는 아주 상반된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여성성을 회복하여 살고 싶은 것이지만 "야식증의 어마어마한 모나리자,/ 간신히 숨쉬는 모나리자"는 간신히, 겨우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생의 의지를 갖고 "비만 진료소 벤치에 앉아 있는 미소의 어머니"인 것이다. "뚱뚱한 매몰의 끝은 천국인지, 지옥인지" 반문하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병리현상을 치료하고 싶은 것이다. 비만을 하나의 병으로 인식한 까닭이다.
김승희 시인의 「뚱뚱한 모나리자」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풍요롭지만 절제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탐욕과 배경과 그로 인한 악순환을 그리고 있다. 김승희 시인의 「뚱뚱한 모나리자」가 개인과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드러낸 것처럼 정숙자 시인 역시 '모나리자'를 청각장애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모나리자의 액자 속에는 소리가 없다. 그녀의 배경은 어둡다. 남들이 백(百)을 들을 때 삼사십을 듣는 모나리자는 늘상 그렇게 앉아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다. 남들이 손뼉 칠 때 손뼉치고 일어설 때 일어선다. 모나리자는 봄비 소리와 가랑잎 구르는 소리를 알지 못한다. 눈 오는 소리의 기억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모나리자는 구김살 없는 반달로 자라 모나리자가 되었다. 그녀는 어느 회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안 들리는 귀는 졸음을 몰고 오지만 입술을 깨물망정 흔들거리지 않는다. 그녀의 뒤에는 언제나 네모난 하늘의 조용한 틀이 있다. 모나리자가 듣는다는 것은 읽는 것이다. 그 어리숭한 눈으로, 전신의 세포로 상황을 읽고 덩어리진 소리를 조각한다. 스테레오는 어림없다. 그녀가 옷을 벗으면 온몸이 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살갗이 귀 모양으로 열려 있다. 그녀의 어깨는 어떤 바람에도 능선으로 놓일 뿐이다. 아무도 아는 이 없다. 그녀가 스스로 달팽이관을 열어 보이기 전에는 그저 행복한 모나리자일 따름이다. 그녀의 왼쪽에만이 사람이 있고 언어가 있다. 누구라도, 연인이 아니어도 나란히 앉거나 서서 말하며… 걷는다. 오른쪽 귀는 창세기 이전으로 잠잔다. 왼쪽만이 삼사십 퍼센트의 파도 소리를 듣는다. 삼사십을 들으며 오늘도 모나리자는 모자라는 이마를 가꾼다. 그녀의 그늘을 이렇게까지 아는 사람은 모나리자에서 차단된다. 세상은 모르는 만큼 고요하다.
-정숙자, 「모나리자는 듣지 못한다」전문
김승희 시인과 정숙자 시인은 '모나리자'를 주제로 한 각각의 시편에서 다 빈치의 그림 속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나 그림과 연관지어 시적 상상력을 펼치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과 미소를 짓고 있다는 점, 그리고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병적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정숙자 시인은 그의 「모나리자는 듣지 못한다」 첫 행에서 "모나리자의 액자 속에는 소리가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에서 말문을 연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언어는 주로 '소리'라는 매제를 이용하여 소통한다. 자연의 움직임조차도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지각할 정도로 소리는 의미를 주고받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그런데 "모나리자의 액자 속에는 소리가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배경은 어둡다"고 이어서 말을 한다. "소리가 없다"와 "배경은 어둡다" 사이에는 사전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타자와 세상과의 소통이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남들이 백(百)을 들을 때 삼사십을 듣"기 때문인데 그런 까닭에 못 알아 들었어도 알아들은 척 "모나리자는 늘상 그렇게 앉아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다." 못 들은 시늉을 하면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치로 길들여진 모나리자는 우리 사회의 슬픈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약자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손뼉 칠 때 손뼉치고 일어설 때 일어선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봄비 소리와 가랑잎 구르는 소리를 알지 못한다. 눈 오는 소리의 기억을 갖지 못"했다. 남들처럼 소리를 완전하게 듣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모나리자가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렇지만 청각적 이미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모나리자이지만 "구김살 없는 반달로 자라 모나리자가 되었다." 살펴본 것처럼 장애를 가진 모나리자이기는 하지만 바르게 자란 듯 싶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관습에 눈치를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통하고 어울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이 모나리자를 성장시킨 것이다.
"어느 회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안 들리는 귀는 졸음을 몰고 오지만 입술을 깨물망정 흔들거리지 않"을 정도로 눈치에 익숙해진 모나리자는 실상 슬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모나리자는 눈으로 소리를 듣는다. "어리숭한 눈으로, 전신의 세포로 상황을 읽고 덩어리진 소리를 조각한다." 남들만큼 귀가 밝지 않은 까닭인데, 그러므로 귀로 감지할 수 있는 "스테레오는 어림없다." 모나리자가 귀가 어둡기 때문에 "온몸이 귀"이다. 귀는 창각기관이지만 귀가 어둡기 때문에 온몸의 세포가 귀의 역할을 해야 한다. 온갖 감각의 촉수로 상황을 파악해야 거기에 대체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녀의 어깨는 어떤 바람에도 능선으로 놓일 뿐이다." 능선처럼 생긴 어깨에 바람이 스치며 소리를 내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다.
누군가 모나리자를 볼 때 그저 행복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언제나 미소를 짓기 때문에 그리고 온몸이 소리를 듣는 귀이기 때문에, 그래서 누가 보아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녀의 귀가 고장이 났다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관능적인 다 빈치의 미소와 정숙자 시인이 그런 모나리자의 미소는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행복한 모나리자"가 아니라 "슬픈 모나리자"가 아닐 수 없다. 모나리자의 귀가 삼사십을 듣는 것은 오른쪽 귀가 듣지 못한 까닭일까.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왼쪽에만이 사람이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일 게다. 왼쪽 귀만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이전, 즉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기 이전에 소리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무(無)의 상태였다. 또는 잠을 자는 깨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나리자는 여성이기에 "오늘도 모나리자는 모자라는 이마를 가꾼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모나리자의 그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많은 시대에, 또는 귀가 많은 시대에 "세상은 모르는 만큼" 또는 듣지 못하는 만큼 고요한 것은 아닐까.
정숙자 시인은 「모나리자는 듣지 못한다」에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청각장애인의 비애와 더불어 밚은 시대의 언어에 대해 매우 친절하게 독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액자 속에서 다소곳이 미소짓고 있는 정숙한 여성에게서 우리 사회의 모순과 아픔을 발견해내고 있느니 '정숙자' 시인의 정숙하지 않는 상상력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 이 글과 함께 수록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풍경(1473년)>
<암굴의 성모 (좌:1483~1486년, 우:1493~1508년)> <레다(1506년 이전)> <모나리자(1503~1515년 사이)>
<세례자 요한(1508~1513년)> <최후의 만찬(1495~1498년)>
* 계간 『시와사람』2015-여름호 <문학과 미술의 만남 · 23> 전문
* 강경호/ 199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계간 『시와사람』을 창간하였으며,
시집『함부로 성호를 긋다』『휘파람을 부는 개』외
문학평론집 및 연구서『휴머니즘 구현의 미학』『최석두 시연구』,
미술 평론집『영혼과 형식』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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