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살해된 죽음/ 이이체

검지 정숙자 2014. 12. 7. 23:27

 

 

     살해된 죽

 

      이이체

 

 

  우리는 주검에서 피어난 쌍둥이 괴물. 청춘을 불태워봤자 늙어서 남

는 것은 한 줌 잿더미일 뿐이다. 겨울이 비극에 사로잡히자, 색 바랜 풀

꽃들이 눈보라를 연주하며 계절을 위로했다. 바다가 메마를 때까지 기

다리고. 우리를 기다리던 바다의 뼈.

 

  일 년이라는 것은 그저 계절들이 차례대로 미치는 단위에 지나지 않

는다. 찬란한 물이 고체의 언어를 발음할 때부터, 비로소 우리는 기형에

짓밟힐 수 있었다. 허무가 향기로운 봄, 서로의 몸에서 닮지 않은 부분

을 찾아내려고 우리는 이듬해 봄이 올 때까지 거울이 되었다. 뼛속까지.

 

  해변을 거닐며 모래에 찍은 발자국. 파도가 한 번 쓸어서 가져가면,

그 발자국은 이제 누구의 소유인가. 감정이 병들어서 우리는 참담을 기

억할 자격이 없었다. 바다가 물로 뼈를 감추고 넘실거리던, 풍요롭고 앙

상한 겨울을 애도한다. 세계 때문에 우리가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고 다

짐했다. 아프다, 뼈아프다. 오해보다 이해가 병이다.

 

  뼈밖에 남지 않은 바다에 재를 뿌린다. 물수제비 뜨는 자리마다 피고

지는 허공의 발자국. 나머지 계절들이 모두 비만해서 하늘에서는 아무

것도 내리지 않았다. 물이 흐르지 않을까 봐 우리는 눈을 뜨고 두려워했

다.

 

  인간의 슬픔을 미화시켜 줄 세계가 없다. 우리 생애 가장 눈부신 암흑.

그리워하지 않겠다, 얼음이 서려 있는 편지 귀퉁이마다 하얗게 녹지 않

는 슬픔, 슬픔들. 푸른 봄이라니, 우리를 웃긴 그 언어. 부디 거짓말하지

말아라. 우리는 끝나지 않은 겨울을 소진하느라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렸

다.

 

 

   * 현대시회 사화집『 K-POEM 2014』174~175쪽

   * 이이체/ 충북 청주 출생, 2008년『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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