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무국적 발자국/ 김보나

검지 정숙자 2023. 12. 27. 02:16

 

<제1회 동행문학 젊은 시인상 수상작> 中 

 

    무국적 발자국

 

     김보나

 

 

  창밖으로 싸락눈이 흩날렸다

 

  저녁에는 내 방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으로 탄생할지

  내기를 했다

 

  지혜는 뱀

  은민이는 식충식물

 

  사람을 고르는 쪽은 없었다

 

  케이크의 초를 끄면

  눈앞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하루

 

  생일이 좋았다

 

  내게 말을 거는 자를

  적의 없이 바라볼 수 있어서

 

  타인이 건네는 말을

  덜 두려워할 수 있어서

 

  코끝에는 연기 냄새

  

  어두워진 세상에서

  다들

  제 몫의 접시를 쥐고

 

  서 있다는 걸 안다

 

  우리는 형광등을 켜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에

  숟가락을 들이대며 웃었다

 

  케이크를 자르면

  빈 공간이 커지고

 

  날 부르는 목소리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해도

 

  한 번쯤 불을 껐던 그 입으로

  누군가를 새로이 축복할 수 있기를

 

  떠나가는 자가 눈에 남긴 발자국을 보며

  겨울이 남긴 화인이라 여겼다

 

  사람들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머리에선 재 냄새가 났다

    -전문(p. 23-25)

  

   ♣ 심사위원: 송기한(문학평론가)  여태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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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행문학』 2023-겨울(5)호 <제1회 동행문학 젊은 시인상> 에서

  * 김보나/ 202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