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조재형_산문집『말을 잃고 말을 얻다』/ 문전박대당한 그분

검지 정숙자 2023. 11. 5. 15:49

<에세이 한 편>

 

    문전박대당한 그분

 

     조재형

 

 

  수사관으로 처음 임용됐을 때 나 역시 승승장구하여 국장까지 승진하고 명예롭게 퇴직하는 꿈을 꾸었다. 정년을 마친 다음 가족들 손잡고 황혼을 누리는 노년을 설계했던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 찾아온 사적인 불행은 내가 검찰을 일찍 떠나도록 당초의 계획을 수정시켰다. 내가 중도 사직의 결심을 처음 밝혔을 때 가족들은 완강히 반대했다. 십수 년 공직의 울타리 안에서 수사만 해온 터라, 내가 재야에 뛰어들어 제대로 헤쳐 나가기 어려울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직으로 굳힌 내 마음을 누군들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모든 걸 내려놓고 빈손으로 시작해야 하는 처지였다. 가족과 친지의 동정을 한 몸에 받는 신세였던 것이다. 나는 한숨으로 보내기보다는 담대한 도전 앞에 선 나를 다독였다. 새벽마다 뒷산을 오르내리며 내가 영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성부와 상자와 성령을 불러 독대를 청했다.

 

      설마 저를 굶기지는 않을 거죠?

      저 혼자 호의호식은 안 할게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그렇게 몇 달을 보내며 내 안에는 신념의 싹이 텄다. 내가 믿고, 나를 믿는 '그분'이 결코 나를 낭떠러지로 보낼 이유는 없다고. 갑작스러운 나의 전직이 낭떠러지로 가는 길이라면 그것 또한 그분의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일사천리로 전직을 준비하고 경험이라고는 없는 제야의 법무사로 모을 시작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사실 수사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사건에만 매달려 왔을 뿐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없었다. 퇴직할 무렵 나를 복기하며 내린 내 스스로의 결산이었다. 쌓아놓은 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처지라고 나를 인색하게 평가한 것이다. 한데 기대하지 않았던 선후배와 친지, 친구들이 내 일처럼 앞장서 나를 도와주는 거였다. 심지어 내가 불편만 주었을 것으로 여긴 이들까지 내 앞에 은인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도리어 나한테 도움을 받았으니 은혜를 갚고 싶다고 후원자를 자처하며 발 벗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예상을 깨는 반전의 역사를 통해 텅 빈 내 곳간을 채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를 옥죄고 있던 빚을 갚고, 잃었던 집도 찾았다. 나를 향한 가족과 친지들의 걱정과  한숨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다.

 

  법무사로 안착하기 위해 일 속에 파묻혀 지내기를 수년째, 어느 날 한 노인이 나를 찾아왔다. 노인은 꾀죄죄한 차림으로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며 손과 발에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어눌한 말씨 탓에 어려운 대화를 이어가며 상담을 진행해야 했다. 노인이 자필로 썼다는 종이를 꺼내는데 삐뚤빼뚤한 필체는 번역이 필요할 정도로 알아보기 힘들었다. 노인의 민원 요지는 이런 거였다. 자신이 타인에게 폭행을 당하여 고소를 하였고, 이어서 손해배상 청구를 하기 위해 소장을 직접 써 법원에 갔으나 퇴짜를 맞았다는 것이다.

  나는 바쁜 업무에 둘러싸여 있었고 무엇보다 노인의 행색을 보아하니 돈 한 푼 없는 처지 같고, 계속 마주 앉아 시간을 뺏기는 게 싫었다. 나는 상담을 대충 끝내고 무료 법률 상담을 해주는 공공법인체 상담소에 찾아가라고 그곳의 연락처를 알려준 다음, 노인을 돌려보냈다. 밀린 일과를 다 마친 후 한숨을 돌리고 나니 문득 성의 없이 등 떠밀어 보낸 노인이 떠올랐다. 책상 뒤에 걸린 십자가를 보는 순간, 쫓아내다시피 보낸 노인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내려온 그 분이라는 생각이 나를 찔렀다.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십자가 위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분이 노인의 모습으로 나에게 찾아온 거였다. 수년 전, 내가 이직을 앞두고 뒷산을 오르내리며 그분과 한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나를 찾아온 거였다. 하지만 그새 눈이 먼 나는 허름한 모습 때문에 그만 그분을 몰라본 것이다. 이름도, 성도 연락처도 모르는 노인을 찾을 방법이란 없었다. 그날 일과를 다 마칠 때까지 내내 맘이 편치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일을 하다가 노인을 생각하면 그의 굽은 등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인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내 기다림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세상 떠난 아버지가 돌아온 것마냥 반갑게 노인을 맞이했다. 사무실 직원들은 태도가 변한 내 속내를 모르기에 의아했을 것이다.

  노인은 처음 찾아왔던 그날 내 사무실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후, 이곳저곳을 불청객으로 전전하다가 뾰족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시 나를 찾아온 거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노인의 말에 귀를 모으니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노인이 원하는 문서를 만들어 주었다.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가면서 한마디 던졌다.

      법무사 양반 내가 땅을 사고팔게 되면 꼭 찾아올게.

    나도 화답했다.

      부동산 사고팔 때 안 와도 좋으니까요, 이 사건 처리될 때까지 힘들면 다시 찾아오세요.

   그 후로 노인은 두어 번 더 나를 찾아와 상담을 하고 돌아갔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아이고 그분 오셨네' 하고 반갑게 영접했다.

 

  노인의 일은 노인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었다.

  언제부턴가 노인은 통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분은 언제 어느 때 십자가에서 내려올지 모른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아니 이미 오래전 허름한 모습으로 나를 스쳐 갔는지 모른다. 다만 눈이 먼 내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내일 당장 또 그분은 올지 모른다. 다만 눈이 먼 나는 초라한 행색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다시 문전박대할 것이다. ▩ (p. 25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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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재형_산문집 『말을 잃고 말을 얻다』 2023. 9. 25. <소울앤북> 펴냄

  * 조재형/ 전북 부안 출생,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 등, 산문집『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 ) 법무사